<책속에서>
p. 20 우치는 틈만 나면 누에 똥구멍과 오물거리는 입을 들여다본다. 왔을 때보다 몸길이가 두 배로 늘어났다. 이틀 전, 누에는 잠을 자고 허물을 벗었다. 회색이던 몸 색깔도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실오라기 한 줄 안 보인다.
p.66~67 대신녀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신탁입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대신녀님, 아무리 신탁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그리 모진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어린애를 제물로 바치다니요!”
우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대신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하늘의 명을 전할 뿐입니다. 나리는 맡은 직무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p.82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밭둑에 납작 엎드려 뿔뿔 기었다. 다행히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뽕나무 밑둥치까지 기어갔다. 나무 둥치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잠시 숨을 죽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나뭇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을 자리였다.
우치는 팔을 뻗어 뽕잎을 띄엄띄엄 땄다. 딴 흔적이 남으면 안 된다. 싸르락, 우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눈을 껌벅거리자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 뛰어올랐다. 심장이 쿵쿵 터질 것처럼 뛰었다.
p. 112 자하는 내내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신궁을 나간다면 자유인이 되고 싶습니다. 신녀 신분과 신탁 제물에서 풀어 주십시오.”
왕은 대신녀를 보았다. 대신녀가 가만히 있자 왕이 손을 들었다.
“좋다. 네 말대로 된다면 그 또한 신의 뜻이다. 신의 뜻으로 신궁을 벗어난다면 너는 자유인이다. 단, 네 발로 걸어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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