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 서승(우석대 석좌교수·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 ― 4
발간사 · 소노다 나오히로(‘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전(前이사장 ― 8
1부/ 역사윤리를 묻다
식민지 지배·강제 연행과 조선인 원폭 피해자 ― 18
‘역사윤리’의 심판 ― 34
나가사키의 중국인 강제 연행 ― 46
나가사키의 전쟁·원폭 기념물을 생각하다 ― 69
나가사키와 조선인 강제 연행 ― 99
군함도가 세계유산이어도 되는가 ― 132
2016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 조조집회 추도사― 138
2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서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를 찬미하지 말라― 144
나가사키와 난징을 잇는 여행 ― 147
세기를 넘어 ‘전사불망’을 ― 150
‘반일(反日’이라고 말하기 전에 ― 153
톈진으로의 여행 ― 158
시험대에 오른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 ― 163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을 다녀와서 ― 168
내셔널리즘에 지지 않는 역사 인식을 ― 172
한일조약의 장벽을 넘어 ― 178
‘역사윤리’를 묻는 해로 ― 184
흔들림 없는 역사 인식을 ― 190
가치를 평가받은 자료관의 존재 ― 201
자료관 설립 20주년 ― 207
한국에서의 강연과 학생들의 예리한 질문 ― 213
‘위안부’ 문제, 성의 없는 한일 합의에 반대한다― 220
3부/ 추모의 글 ―다카자네 야스노리를 사랑한 사람들
‘질문을 던지는’ 자세(야마카와 다케시 ― 228
원수폭 금지운동과 전쟁책임·전후 보상 문제(사카모토 히로시 ― 233
선생님과 함께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운동(히라노 노부토 ― 239
중국인 강제 연행 문제와 다카자네 선생님(신카이 도모히로 ― 243
섬세하고 온화하며 견고한, 강철 같았던 현대의 ‘기사(騎士’(다카하시 신지 ― 248
조선인 강제 동원과 원폭 피해 조사에 길잡이가 되어주시다(허광무 ― 251
4부/ 부록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설립 취지―
일본인 피폭자와 조선인 피폭자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가사키에서 평생을 조선인과 중국인 강제 연행과 조선인 원폭 피해 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 있었다. 그는 2017년 4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건립하고 운영해온 다카자네 야스노리이다.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1939년 일본의 식민지였던 서울에서 태어났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다카자네는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억압 민족이었던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태생을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그런 자의식 때문인지 다카자네는 조선인 강제 연행과 원폭 피해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일본인도 원폭의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피폭 문제는 일본인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그는 생각했다. ““질적인 차이”란 “일본인 피폭자는 침략전쟁을 자행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입장을 비껴갈 수 없지만, 조선인 피폭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없는데 원폭 지옥에까지 내던져진 완전한 피해자다”라는 고(故 오카 마사하루의 역사 인식을 공유하면서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조선인의 강제 연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실증적으로 파고든다.
조선인 강제 연행은 1939년의 각의(閣議 결정 ‘노무 동원 실시 계획(勞務動員?施計?’ 안에 포함된 ‘조선인 노무자의 내지 이주에 관한 건(朝鮮人?務者內地移住に?する件’(같은 해 7월, 내무성·후생성 양 차관 통첩에 따라 개시되었으나 중일전쟁의 격화로 인해 노동력 부족에 빠진 산업계가 강력하게 요청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인 청년을 대량으로 전장에 보내는 한편, 그로 인한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기업이 결탁해 조선인 청년을 강제 연행하고 탄광, 광산, 철강, 조선, 토목, 건설, 군사 등의 시설에서 강제 노동을 시킨 것이다.
일본의 양심답게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조선인의 원폭 피해도 강제 연행으로 인한 결과였음을 거듭 지적한다. 다카자네는 단지 강제 연행과 원폭 피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조선인 ‘위안부’ 문제와 일제가 저지른 난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