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으로 초대하며·임헌영
1 카산드라의 비극
2 이러려고 나라를 되찾았나!
3 아버지와 형의 흔적을 찾아서
4 머리 둘 곳 없는 청춘이여!
5 5·16 쿠데타 학번의 대학생활
6 한국 문단 반세기 훑어보기
7 권력에 길들여지는 언론: 『경향신문』 시절
8 박정희 군부독재 시기의 월간 『다리』
9 유신시기의 지식인들
10 고문과 간첩 조작의 기술자들
11 민족정신사를 담아내는 한국문학 정전 만들기
12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
13 국가폭력, 당신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는가
14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기
15 오늘의 사상, 한길사와 더불어
16 생활글쓰기 운동과 『한국산문』
17 제2의 반민특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18 불확실시대의 평화를 위하여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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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격랑 속에서 꽃피워낸 문학의 길
“문학은 아주 먼 곳을 그리워하는 연정 같은 것”
임헌영은 아주 독특한 이력을 지닌 문학평론가다. 그는 80년의 세월 동안 식민지 시대, 해방과 분단, 독재와 항쟁을 끝없이 경험하며 역사의 격랑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다섯 살 때 8·15 해방을 겪은 그는 먼 친척인 규순 아재가 입영 영장을 받아 온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던 일을 회상한다. 가족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재가 떠나는 당일 “해방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어린 임헌영은 김순남 작곡가의 「해방의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불렀다. 그러나 그해 9월부터 미국이 한국 방송과 신문 등 여러 매체에 관여하면서 한반도를 빠르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8·15 이후 남북을 막론하고 가장 시급했던 민족사적인 당면과제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이었지만 우리는 해방을 미국에게 도둑맞고 만 것이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서던 이승만이 미군 조기 철수를 주장하던 국회의원을 제거하기 위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했다. 결국 그해 6월 26일에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그다음 해 보도연맹 관련자 검거령이 내려 그의 작은아버지가 감옥에 갇혔고 아버지는 동생을 구출하려고 갔다가 도리어 옥에 갇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임헌영은 폭풍우 같은 역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마감했다. 그의 많은 가족들이 역사와 함께 저물어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해방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부터 그는 역사의 무게를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안동사범학교에 입학하던 1956년 5월 15일에 제3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둥이자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는 반(反이승만 투쟁을 위해 범야권 단일화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익희는 선거를 앞두고 5월 5일 심장마비로 서거했고 이로써 민족적인 양식을 지닌 야당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헌영은 학우들과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하며 문학의 길을 꽃피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