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때는 깐깐 선생, 귀양에 가서 골골 선생,
큰 깨달음을 얻은 뒤에 까닥 선생으로 변하는 생동감 있는 캐릭터
청년 정약용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밤낮없이 공부에 열중해서 공부를 좋아하는 정조 임금의 눈에 들어 배다리 만들고, 수원성을 짓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는 탐관오리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정약용은 원칙에 철저한 깐깐한 사람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이때의 정약용을 깐깐 선생이라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조 임금이 돌아가시자, 불행이 시작되었다. 정약용은 서학쟁이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 길에 올랐다. 전라남도 강진 땅 주막집 골방에서 몸도 마음도 무너진 상태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지내던 정약용을 골골 선생이라 부른다.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고 기운을 차린 정약용은 자신의 일을 찾는데, 바로 세상을 바꿀 연구를 하고, 책을 쓰는 일이었다. 정약용은 18년의 긴 유배 생활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쓰면서 실학의 대가로 우뚝 서게 된다. 이 시기의 정약용은 까닥 선생이 되어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 책은 입신양명의 시기, 좌절의 시기, 참된 경지에 도달한 시기를 재미있는 캐릭터 이름을 붙여서 표현한 작가의 아이디어 덕분에 인물을 훨씬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
시련을 학문으로 이겨 낸 진정한 학자, 정약용의 삶을 배우다
정약용은 혈기 왕성하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도, 18년간의 귀양살이 시절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거중기를 발명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감해 줄 수 있었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유배지에서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시를 쓰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 연구하고 책을 집필하였다. 결국 후세에까지 길이 남는 실학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사실 정약용이 현실 정치에서 계속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실학자로서 업적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