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1장 왜 공주에 충청감영을 열었을까?
마침내 공주가 되다: 고마나루에서 공주까지
공주의 가치를 발견하다
공주에 감영을 설치하라
충청도의 중심이 되다
*흥미진진 역사 보따리 충청도, 너의 이름은?
2장 수령들을 감찰하고 백성을 교화하라
관찰사와 감영의 변천
백성의 평안을 책임지다
국가 재정을 위해 세곡을 거두다
농사를 권장하고, 인재를 기르다
형옥과 병마, 성곽을 관리하다
*흥미진진 역사 보따리 어사와 관찰사는 무엇이 다를까?
3장 명실상부한 호서의 중심 공주
신령한 산 계룡에서 평안을 빌며 제를 올리다
공주 문화의 또 다른 축, 공주의 절들
왕에게 바치는 예물, 진상과 충청감영
역원과 장시
*흥미진진 역사 보따리 조선의 도읍이 될 뻔한 계룡산
4장 역사의 현장, 충청감영
인조의 공주 파천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든 황새바위
우금티 마루에 펄럭이는 피에 젖은 깃발
의를 세우고자 일어난 공주의 의병
*흥미진진 역사 보따리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 영규대사
참고자료
오랜 역사의 뿌리를 가진 충청의 중심 도시
현재 공주는 웅진백제의 수도로 유명하지만, 공주가 오래도록 충남권(호서의 중심도시였던 것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백제의 수도가 되었던 어떤 연유, 예를 들어 차령산맥과 금강, 계룡산과 같은 자연적인 방벽, 삼남으로 향하는 길들과 금강을 통한 수운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지리적 이점, 내포를 비롯해 호서의 비옥한 평야지대와 가깝다는 경제적 까닭 등 공주가 오래도록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고 번성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백제의 문주왕은 아버지 개로왕이 고구려 군대에 패해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은 상태에서 나라의 운명을 건 천도를 단행했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이 웅진-공주였다. 고려 현종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40만 대군의 병력으로 고려를 침공하자 남쪽 나주로 피란을 떠났다. 1011년 1월, 겨울 추위 속에 떠난 피란은 신하나 백성들의 냉대와 외면 속에서 비참했지만, 공주에서 비로소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환대를 받으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후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에 들러 시간을 보냈으며, 김은부의 딸들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 사이에서 나온 아들들이 이후 왕이 되어 덕종, 정종, 문종으로 이어졌다.
조선 인조는 반정 공신이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역시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가 피란지로 머물렀던 곳이 공주 공산성으로, 현종과 마찬가지로 피란길에 받았던 냉대와 외면과 달리 공주에서 따듯한 환대를 받았다. 이괄의 난은 바로 진압되었는데, 인조는 며칠 더 공주에 머무르면서 그 인연을 더욱 깊게 했다.
웅진백제 당시에 나라의 목표는 ‘갱위강국’이었다. 다시 강국이 되겠다는 이 꿈은 꿈으로 그치지 않고 역사가 되었다. 비록 처음 공주에 자리 잡은 문주왕은 일찍 그 꿈을 접었지만, 이후 동성왕, 무령왕, 성왕을 거치며 예전의 강성한 백제가 되었다. 고려 현종도, 조선 인조도 외침과 반란이라는 극도의 혼란을 잘 수습해 다시 나라를 살필 수 있었다. 공주와 우리 역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