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광복이 오리라 ‘불원복(不遠復’
고광순 「불원복 고대장」
충효와 의열의 집안 장흥고씨(長興高氏 11세손 고광순은 나라가 망국의 조짐을 보이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항일의병의 길을 택한 인물입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주창하기도 하였습니다.
1896년, 고광순은 기우만, 고제량과 함께 호남 일대에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합니다. 1907년, 고광순은 의병전략으로 일제 군경과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 전략을 구상합니다.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하고,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을 선택합니다. 골짜기가 깊은 데다 동쪽엔 화개동, 서쪽으로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연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고광순 의병장은 전략가이자 불굴의 신념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이라고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춰갑니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총공격을 가하며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고, 의병도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집중포화를 받고 1907년 고광순과 고제량, 의병들이 순국하였습니다. 「불원복 고대장」을 통해 고광순 의병장의 의로운 삶과 항일정신이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