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독립이 나의 독립이다”
「나,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일제시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여성지식인이자 민족운동가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며 김마리아의 애국충정의 마음을 기렸습니다.
김마리아는 일찍이 정신여학교롤 졸업한 후 1910년대에는 도쿄 여자학원에 유학했고, 1921년 중국 망명을 감행한 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학사에서 석사까지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른 시기에 본격적인 외국 유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지만, 김마리아는 무엇보다 애국적 열정에 불타는 민족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일본 유학 당시 2·8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은 전 여성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3·1 운동 때는 여성 참여를 조직·격려하다 체포당했으며, 이때 혹독한 고문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7월에 병보석으로 나오자마자 대한애국부인회를 주도해 다시 체포당했습니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나는 일본 연호를 배운 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오”라며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습니다. 이후에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미국 유학 중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고문에 시달린 후 심신이 참혹할 정도로 망가져 내내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독립활동에 몸을 바칩니다.
“내 청년 시절에는 나라가 없었다오. 그 문제가 내 청년 시절의 시름이었고, 나라의 독립이 나의 독립이기도 했소. 그것과 함께 부둥켜안으며 살았소. 내 일신을 위한 성취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청춘이 할 수 있는 낭만이자 헌신이었소.”
김마리아는 결국 해방이 1년여밖에 남지 않았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