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뚫고 희망을 찾아 독립군의 어머니로 살다
허은 「먼동이 틀 때」
허은은 1907년 1월 경북 선산군 구미면에서 셋째 아이 태어났고, 외동딸이었습니다. 그해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일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 시켰고, 8월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 잃은 타국 생활이 순탄할 리 없습니다. 막상 도착한 희망의 땅은 광활했지만 척박했고, 남의 나라, 남의 땅이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쌀을 주식으로 하지 않은 탓에 벼농사를 지으려면 직접 개간을 해야 했습니다.
허위는 틈틈이 조선을 오가며 동지들을 만나고, 군자금을 전하고,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집안 남자들은 바깥일에 전념하였고, 구들장 데울 땔감 구하는 일도 집안 여자들이 도맡았습니다. 며느리, 딸들은 땔감으로 쓸 짚을 얻으러 동네를 돌아다녔고 추운 만주 땅에서 겨울을 견디며 사는 것도 역시 며느리, 딸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1910년대 만주로 건너간 허은 또래 여성들은 교육도 받기 힘들었습니다. 여자는 집안일만 도와야 한다는 아직 유교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허은은 신흥무관학교를 다닌 큰오빠가 군사훈련 받은 이야길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계집애는 글 배우면 못 쓴다고 해서 나는 학교 가고 싶다는 말도 감히 꺼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허은은 한 평생을 이름 없이 살았습니다. 그저 이병화의 아내, 이준형의 며느리, 이상룡의 손자 며느리였습니다. 시할아버지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다가 1926년에 물러나 다시 만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합치는 일에 몰두했지만, 1929년 무렵엔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1930년경엔 이미 70세를 넘겨 연로한 이상룡은 낚싯대를 들고 나가 소일하거나 동지들을 만났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아버니 이준형은 1930년 무렵부터 병을 얻어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습니다. 남편 이병화는 연로한 어른들을 대신하기라도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