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다
한백봉 「사람 냄새」
한백봉은 1881년에 태어나 경기도 광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평민이었습니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광주의 유지들과 함께 조선독립의 취지에 공감하고, 이후 돌마면에 돌아와 고향의 문중 어른과 마을의 원로들에게 서울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율동의 인근 주민에게 만세운동의 정당성에 대해 설파하였습니다. 한순회, 유창석 등과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초대 낙생 면장 남태희와 협의하여 연합시위를 구상, 거사일을 분당리 장날로 택하였습니다.
3월 26일, 마을 뒷산에서 봉화를 피워 격양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3월 27일 분당리 장터에서 군중 1,000여 명을 규합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다음날, 3월 28일에는 돌마에서 시작하여 낙생면 판교리에 이르렀을 때에는 시위군중이 3,0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집회가 되었습니다. 한백봉은 밤에는 횃불, 낮에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 안에 주둔한 헌병 1개 소대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강제 해산되었고 한백봉은 그날,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한백봉은 4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하였고, 이후 항고하였으나 7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을 거쳐 서대문감옥에 이감되었고 13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20년 4월 28일에 만기 출옥하였습니다.
한백봉은 이후 1927년에 민족협동전선의 흐름에 따라 돌마면의 유지들과 함께 조선농민사 지국, 청년단체, 노동공제회 등의 단체를 토대로 신간회 지회 설립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 진영의 사회단체와 사회주의 진영의 조직체가 일정 부분 결합되어 신간회 광주지회를 탄생시켰습니다.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한백봉은 간사로 참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