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제1장 동학당의 난
동학당의 난 ■ 조선국 파병의 내각 회의 결정 ■ 일청 양국의 조선에서의 권력다툼 ■ 위안스카이袁世凱, 왕봉조汪鳳藻 등의 오판 ■ 조선 국왕, 청국에 원병을 청함
제2장 일청 양국 군대의 조선 파견
톈진조약 ■ 청국 정부가 조선국에 파병함을 우리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청국 정부의 공문에 있는 ‘보호속방’이라는 말에 대한 제국 정부의 항의 ■ 제국 정부가 청국 정부에 대해 조선국에 파병한다는 공문 통보
제3장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및 취임 후 조선의 형세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 오토리 공사, 해병을 인솔하여 경성에 들어가다 ■ 조선에서의 구미 각국 관민官民의 정황
제4장 조선국 내정 개혁을 위한 일청 양국 공동위원 파견 제안
일청 양국 공동위원의 조선 파견에 관한 각의 ■ 일청 양국 공동위원회의 조선국 파견에 대해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를 거쳐 동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일청 공동위원설립 제안에 대한 청국 정부로부터의 이의 ■ 청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제5장 조선 개혁과 청한 종속 문제에 관한 개설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적 구문명의 충돌 ■ 조선 내정 개혁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朝野의 여론 ■ 조선 문제에 관한 주제와 객제의 관계
제6장 조선 내정 개혁 제1기
청장淸? 섭지초葉志超가 위안스카이에 보낸 전보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기밀 훈령 ■ 조선 내정 개혁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건의 ■ 조선 국왕, 스스로 죄가 있다는 조서를 발포?布함 ■ 오토리 공사에게 최종 수단을 취하라는 전훈電訓 ■ 오토리 공사, 조선 정부에 최종 공문을 보냄 ■ 위안스카이, 돌연 귀국 ■ 용산 주둔 제국군대가 경성에 들어감 ■ 원군의 입궐 ■ 조선 국왕, 오토리 공사의 참내參內 요청 ■ 선전宣戰의 조칙
제7장 구미 각국의 간섭
러시아의 권고
이홍장과 카시니 백작의 담판 ■ 러시아 정부의 권고 ■ 러시아 정부의 권고에 대한
청일전쟁의 본질: “경복궁을 점령하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메이지27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年日淸?史』를 통해 “조선의 독립 실현을 방해하는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청국과 싸웠다”고 청일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과연 그러한가.
무쓰 무네미쓰는 이 책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첫머리에서 “청일전쟁에서는 육지와 해상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오직 ‘아산 전투’만 외교가 앞서서 전쟁의 발단을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무쓰는 이 책에서 스스로 청일전쟁의 목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책의 행간과 교주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철저한 교주 및 해설에서 우리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청일전쟁의 최초 무력충돌이 1894년 7월 25일의 ‘풍도해전’이라고 소개하며 대부분의 일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쓰의 지휘 아래 오토리 조선 주재 일본공사가 실행한,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의 ‘경복궁 무력점령’이 최초의 무력충돌이다. 이른바 7·23 사변, 즉 경복궁 점령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청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각본에 따라 수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이 책에서 무쓰는 이를 시인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먼저 조선 국왕을 우리 수중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본서 141~142쪽”고 했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 국왕을 ‘포로’로 삼은 뒤 조선 정부로부터 “아산의 청국 군대를 몰아내는 위탁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받아내게 된 것”(본서 140쪽, 바로 그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조선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곧 조선의 망국이었다.
청일전쟁의 최고 권위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
『건건록』은 일본 외무성에서 처음 인쇄하여 1896년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외교 기밀에 관련된 비밀문서로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