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화교의 기원
푸젠의 민난인은 어떻게 화교가 되었나
민난 상업 네트워크의 역사지리적 배경|대량 이민의 시작|동향조직의 기능|아편과 화교|중국계 릭쇼 쿨리와 아편|화교의 탄생
실크로드와 화교
해상 실크로드의 변화|화교의 여러 뿌리|화교의 동향조직, 푸젠회관과 진지앙회관
?취안저우와 샤먼 사이, 장저우 월항의 전성기
2 보이지 않는 영토, 네트워크의 형성
송금 네트워크의 시작과 수객
네트워크와 화교|가족의 소식은 만금과도 같고|수객과 교비업의 탄생
?교비가 지역 경제와 국가 경제에 미친 영향
교비국 네트워크의 형성
수객의 한계 |교비국 네트워크의 탄생과 구조
근대 금융 네트워크로의 확장
교비업계와 은행업|화교은행의 설립|화교은행과 교비업 네트워크
?전쟁과 교비업
3 이익과 생존, 내셔널리즘의 충돌
동남아 화상이 근대를 살아가는 법
아시아의 근대와 제국의 상인|제국의 상인들: 인도 상인과 일본 상인|‘제국 없는 상인’, 화상의 생존법|다국적과 무국적의 화상들
?부유한 화교 자본가는 혁명에 관심이 없다?
친일의 두 얼굴, 오분호와 림분컹의 친일과 그 후
오분호의 상업활동|림분컹의 사회사업 활동|같은 친일, 다른 평가
?전쟁과 화교은행
제국민과 국민 사이 ‘호키엔’ 정체성-탄카키 또는 천지아겅
동양의 헨리 포드, 탄카키의 성공|탄카키의 ‘친공애국’ 활동|탄카키와 천지아겅
4 교류와 적응
바다 위 알라신을 믿는 중국인들
중국의 이슬람화한 중국인|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한 중국인|인도네시아 중국계 무슬림의 과거와 현재
?중국계 무슬림 화교
이주의 상징, 혼혈의 탄생
대항해시대와 유럽의 동남아시아 진출|포르투갈 혼혈, 메스띠꼬스와 끄리스땅|메스티조와 페라나칸|서구 식민 세력과 중국계 혼혈의 관계
하이난 퀴진, 싱가포르 하이브리드 문화의 결정체
5 코스모폴리탄의 남중국해
동남아시아 하이브리드 건축, 숍하우스
19세기 동남아시아의 코스모폴리탄 공간|숍하우스 베란다 공간의 기원|숍하우스 건축양식의
화교의 기원, 푸젠의 민난인은 어떻게 화교가 되었나?
바다로부터 시작된 민난 지역의 정체성은 이슬람 중심의 해상 실크로드에서는 취안저우라는 국제무역항을 통해, 근대에 들어서는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으로 개항한 샤먼을 중심으로 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해 외부와의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초국적, 초지역적으로 형성되었다. 명·청 대 민난 지역의 가장 유명한 수출품은 차(茶였다. ‘티’의 어원이 민난의 방언인 ‘떼’에서 기원했을 만큼 푸젠은 차의 주산지로 안시의 철관음, 우이산의 대홍포 등의 차는 유럽 귀족의 기호식품이 되었다.
그러나 『화교 이야기』에서 김종호 교수는 민난 지역의 진정한 ‘히트상품’은 바로 사람이라 썼다. 남중국해를 오간 화상의 활동은 취안저우가 대항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당대부터 송·원 대를 거쳐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지만, 근대 시기 민난인의 해외 활동은 주로 동남아시아로의 ‘노동이민’이 그 핵심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동남아의 대부분을 식민화하고, 자원 착취라는 목표를 위해 건설한 아편, 설탕, 커피, 팜오일, 고무 농장 및 주석, 금은 광산에 필요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중국으로부터 충당했다. 이른바 계약화공, 릭쇼 쿨리(인력거꾼 등 대량 이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교(華僑’라는 용어는 언제 생겼을까? 동남아시아에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출신지에 따라 민난인, 광둥인, 차오저우인, 하이난인, 커지아인으로 각기 불리거나, 혹은 화상, 화공, 쿨리 등으로 그 직업에 따라 불려왔다. 이들을 모두 화교라는 용어로 공식화한 것은 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바로 ‘화교’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화교들의 송금이 청 제국 경제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자 종래 해적시 하는 태도를 바꾸어 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는 중화를 의미하고, ‘교’는 위진남북조부터 쓰인 용어로서 ‘잠시 머무르는 이’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해외 동포를 ‘교민’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나왔다.
보이지 않는 영토, 화교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