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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덕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교수
올해는 루터의 종교 개혁이 5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개혁의 횃불을 든 이후, 그 불길은 전 유럽으로 빠르고 깊숙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지역마다 독특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신학적 요인들이 복잡하고 독특한 화학 작용을 일으켰고, 다양한 형태로 개혁이 발전·확산된 것입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신학적 각성이 면죄부와 교황권으로 상징되는 중세 교회의 왜곡된 구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종교 개혁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을 넘어, 유럽의 총체적 변화를 야기했습니다. 문화의 핵심인 종교의 변화가 문화 자체의 변화로 이어진 대표적 경우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루터의 종교 개혁은 아나뱁티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아니, 루터의 종교 개혁이 아나뱁티즘을 통해, 새로운 모양과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루터의 신학적 각성은 분명히 중세의 한계를 뛰어넘은 위대한 혁신이었습니다. 동시에, 루터는 당시의 역사적 한계에 철저히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의 개혁이 근대의 문을 열었지만, 중세의 범주를 넘지 못한 면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학적 사유에서 출발한 종교 개혁이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에 휘말리면서, 루터의 개혁은 본래의 순수성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진행된 개혁이었기에, 태생적 한계가 자명했던 것입니다.
이런 루터의 한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했던 개혁자들이 바로 아나뱁티스트들입니다. 그들도 여전히 가톨릭의 후예요, 루터와 츠빙글리가 추진했던 개혁의 연장선 위에 존재했지만, 16세기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집요하게 시대의 한계에 도전하며, 신학적·신앙적 갱신을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이 이신칭의에 머물고 있을 때, 그들은 제자도를 추구하며 ‘예수 따름’을 강조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국가와 교회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