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다시, 삼척 사건을 떠올리며
서론: 1979년, 비극의 시작
제1부 ‘삼척가족간첩단 사건’의 기원과 실상
제1장 한국전쟁, 비극의 기원
1. 일제시기와 해방 후 삼척의 사회적 변화와 정치운동
2. 삼척의 한국전쟁
3. 전쟁과 삼척 사건 관련자들의 삶
제2장 삼척가족간첩단 사건의 실상
1. 간첩 수사의 일반적 특징과 수사기록의 의미
2. 사건의 발단
3. 수사과정과 고문
4. 수사기록에 나타난 활동내용
제3장 끝나지 않은 비극
제2부 사건 이후의 삶과 재심과정
제4장 ‘간첩’ 그 후
1. 무너진 삶들
2.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한 진실규명 시도
제5장 다시 법정에 서다 1: 김순자, 윤정자, 김순옥
1. 재심청구에 나선 여성 3인
2. 재심과정과 변론 요지서
3. 재심의 결과─ 승소와 그 영향
4. 검찰의 상고와 대법원의 무죄 확정
제6장 다시 법정에 서다 2: 진항식 외 7인과 김태일
1. 재심청구와 법원의 재심개시 결정
2. 춘천지방법원의 재심(1심 무죄판결
3. 검찰의 항소와 서울고등법원의 무죄판결
4.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
결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짓밟은 국가폭력
주
‘삼척가족간첩단 사건’ 그 37년의 전모
삼척 사건은 전쟁을 기원으로 하여 일상의 삶을 폭력적으로 중단시킨 여러 간첩 사건 중 하나다. 이 사건은 원심과 재심 두 번의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가 무죄로 뒤바뀌는 극단적 엇갈림을 보여주었다.
사건의 대체적 얼개는 이렇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점령하에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부역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진 진충식, 진현식 형제가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다. 그중 진현식이 1965년과 1968년 남파되어 모친을 모시고 있던 동생 진항식을 찾아왔고, 이에 모친과 동생 그리고 가족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돌아온 피붙이를 보호한다. 그런데 북한으로 복귀하던 중 부상을 당한 진현식이 인근에 살고 있던 고종사촌 형 김상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그의 가족들까지 연루된다. 이를 10여 년이 지난 1979년 8월 9일 치안본부가 ‘삼척가족간첩단 사건’으로 발표한 것이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과 강원도경 대공분실이 담당한 수사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남영동 대공분실은 최초 수사를 담당해 사건의 대체적 얼개를 구성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경찰 대공기구는 체포와 연행과정의 불법은 물론이고 수사과정 역시 구타와 고문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심지어 가족 구성원을 사형시키겠다는 협박도 동원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사발표는 앞뒤가 안 맞는 모순투성이였다. 단적인 예로 대학생 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발표 내용은 전혀 근거가 없었고 심지어 수사기록에도 관련 내용이 전무했다. 수사기록에 나타난 간첩단의 활동은 14년간 암약했다는 경찰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군사기밀 탐지는 누구나 버스 한 번 타고 돌아보면 알 수 있는 검문소나 군부대 위치 또는 군 복무 시절 알게 된 통상적 내용에 불과했다. 조직원 포섭으로 포장된 활동은 계원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한 것이 전부였다.
재판은 일사천리였다. 1979년 12월 20일 1심 재판부인 춘천 지방법원은 진항식과 김상회에게 사형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