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18세기 조선의 길목에서
Ⅰ. 연구사 검토
Ⅱ. 생애와 저술활동
1. 가계
2. 사우관계 및 학통
3. 저술활동
Ⅲ. 제자백가에 대한 이해
1. 『팔가총론』·『팔가총평』의 저술 배경
2. 『팔가총론』·『팔가총평』의 체재와 내용
3. 제가백가 인식에 대한 의미
Ⅳ. 이학관과 서학 경험
1. 17세기 이전 조선 정치사회의 이단 비판론
2. 신후담의 이학관
3. 서학 정보에 관한 경험
Ⅴ. 서학에 대응하는 비판과 이해
1. 이익·이식·이만부와의 서학 담론
2. 서학에 대응하는 학술적 논변
Ⅵ. 경학사상의 이해와 해석
1. 경학사상 관련 자료
2. 생애 시기별 경학사상
여언 동아시아에 미래의 길을 묻다
미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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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하빈연보」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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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담은 동아시아 문물의 본원本源은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주대周代까지의 하화夏華 문물, 즉 성인聖人들이 이룩한 유학원형儒學原型이라 자부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보았다. 그는 『팔가총론』?『팔가총평』 등을 통해 제자백가사상의 비판적 선택은 물론 유학본원에 벗어난 유가儒家 사상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경학이해에 있어서 한대漢代는 물론 송학宋學까지 비판적으로 걸러내면서 선진시대 수사학洙泗學 복원 구명에 전념하였다. 그러한 그의 고구考究 과정 중에 16~17세기 동안 중국·일본 등을 통해 서학이 조선으로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정치사회에서 벌어지는 당쟁도 유학원형에 벗어난 학설상 차이가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한편으론 18세기 조선 선비의 관점에서 유학원형 회복을 통한 서학대응에 선구자로 나서려했던 면으로도 읽혀진다. 그가『돈와서학변』 저술에서 드러난 서양문물 비판적 대응, 이익과 서학담론을 벌인 <기문편>에서 서양과학 보다는 천주 교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강하게 비판한 그런 국면은 다음과 같은 그의 사유를 추측해볼 수가 있다.
그는 스스로 일천 번 이상 독서한 『논어』?『맹자』를 해석한 『논어차의』?『맹자차의』등을 통해 유학원형을 ‘콸콸 샘물이 솟아나오는 근원’으로 사유했을 개연성을 합리적으로 추측해 보았다. 맹자는 “근원이 있는 샘물이 콸콸 솟아나와 밤낮으로 쉼 없이 구덩이를 채우고 흘러내려 사해四海에 이르니, 근본이 있는 것이 이와 같다.”라는 그 원천이 바로 하화문물, 즉 유학원형이라고 신후담은 확신한 것으로 읽혀진다.
한편, 맹자는 “진실로 근본이 없으면 7, 8월 사이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려서 크고 작은 도랑이나 하천이 흙탕물로 넘쳐나도 그 물은 곧 말라버린다.”고 했듯이, 신후담이 서학을 허학虛學으로 비유한 논지는 결국 서학은 ‘근원이 없는 7, 8월의 폭우’로 해석했을 가능성이다. 그는 7, 8월에 내리는 근원 없는 물이 범람할 서학물결이 조선에 위협으로 다가온 그 추세를 18세기적 관점에서 동아시아 유학원형 복원논리로 대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