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
<서경시화 권1>
서문(1|서문(2|평안도 문학의 기원|우리 문학의 시조 을지문덕|귀신의 도움을 받은 정지상|정지상과 김부식|조연수의 시|조준의 시|이승소의 고향|한극창과 김은서의 시|홍승범의 시|강의봉의 시|임제와 『상영록』|박위의 시|허관의 시|전벽의 시|황윤후의 시|이진의 시|기자의 후손 선우협|김여욱의 시|김여욱과 허관의 우열|오준망의 시|양만영의 시|홍익중의 시|허절이 명성을 떨치다|홍만조가 허절을 인정하다|이만우의 시|이시항의 시|전석지의 시|허필의 시|허절과 김점의 인연|김점의 중부|이인채의 재주|근래 평안도 문인들|평양 이외 지역의 발전|평안도 문인의 대두|『고려사』에 수록된 평안도 문인|김반의 시|어변갑의 급제를 예언하다|어변갑의 시|어세겸의 시|김안국과 김정국|김정과 김필성의 시|최덕중의 시|한우신의 시|변환의 시|변지익의 시|윤영, 김호익, 안헌민의 시|정두평의 시|임익빈의 시|민광보의 시|허휘의 시|강간이 정우량의 인정을 받다|청북 문인의 대두|문신기가 선조에게 인정받다|김현중과 김남욱의 시|중국인 정선갑|유상기가 남구만의 대구를 짓다|평안도의 의로운 선비들|휴정의 시|평안도 승려의 시|낭열의 시|평안도 여인의 시|평안도의 신동|평안도인의 저술|평안도인의 문집|저술을 남긴 평안도인|문집이 있는 평안도인|『동문선』에 수록된 평안도인의 시|역사책에 수록된 평안도인|시호를 받은 평안도인|평안도의 서예가(1|평안도의 서예가(2: 김학기|평안도의 서예가(3: 홍승범|평안도의 서예가(4: 변환|평안도의 서예가(5: 조흥종|평안도의 서예가(6: 양의원|평안도의 서예가(7: 홍선|평안도의 서예가(8: 김여욱|평안도의 서예가(9: 황재요|평안도의 화가(1: 조세걸, 송창엽|평안도의 화가(2: 김진여, 최만하
<서경시화 권2>
우리나라 시가의 기원|평안도의 사언시|기자의 <홍범>(1|기자의 <홍범>(2|평안도의 명(銘, 찬(贊, 전(傳|어세겸의 <귀물명>|양덕록의 <고경명>|이진의 <갑을장명>|이진의 <추우찬>|김태좌의 <수박자전>|변지
김점과 『서경시화』
『서경시화』의 편자 김점은 열예닐곱 무렵 평안도 지역에서 시명(詩名이 높았던 허절(許?을 사사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1717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김유(金?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1721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끝내 문과에 급제하지는 못했다.
그가 지역문학 정리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료 수집에 착수한 것은 비교적 젊은 시절의 일이다. 1728년에 쓴 『서경시화』의 첫 번째 서문에서 그는 평양 문인들의 문학적 성취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장차 이들의 행적이 민멸될 것을 우려하여 이 책을 편찬한다고 밝혔다. 이해 일차적으로 편찬을 완료했으나 수록 대상이 평양 문인에 한정되었다는 점을 스스로 문제 삼고, 평안도 일대로 범위를 넓혀 5년 뒤인 1733년 증보를 마친다.
『서경시화』는 지역문화 전통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편찬된 저술이면서도 그 초점이 철저히 ‘문학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개의 시화서는 일화잡기류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고, 순수한 문학비평만으로 구성된 경우는 드문 편이다. 반면 『서경시화』는 조선 후기의 어떤 시화서와 비교하더라도 전문적인 문학비평서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특히 『서경시화』에 실려 있는 문인과 작품의 상당수는 다른 문헌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의 가치는 여기서 빛을 얻는다.
소외의 공간에서 잉태되는 문학
조선시대 평안도는 소외된 지역이었다. 평안도인은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중앙 진출이 쉽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까지도 고위직에 오른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 사실 경제적ㆍ문화적 격차의 심화에 따른 지방 소외와 이로 인한 갈등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서북 지역의 소외는 이익(李瀷이 “국토의 절반을 잘라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고 했듯 그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했으며, 그 정도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서북 지역이 경제적ㆍ문화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현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