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 여행을 시작하며
흑역사 1: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오해가 불러온 참극
흑역사 2~3: 조국에 등을 돌린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의 우유부단함
흑역사 4: 왜 다리우스 황제는 25만의 군사를 두고 도망쳤을까?
흑역사 5: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알렉산드로스의 선택
흑역사 6: 원로원은 왜 독재관 카이사르를 한 달 만에 암살했을까?
흑역사 7: 로마제국 최대의 패배를 이끌어 낸 게르만 인 아르미니우스
흑역사 8: 작은 전투에 뛰어들어 죽음을 자초한 황제 율리아누스
흑역사 9: 고트 족을 적으로 만든 로마의 탐관오리들
흑역사 10: 앵글로색슨 왕조를 무너뜨린 해럴드 왕의 조급증
흑역사 11: 비잔틴제국의 운명을 결정한 하룻밤의 전투
흑역사 12: 리처드 왕이 적지에 요란을 떨면서 잠입한 대가
흑역사 13: 만약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복했다면?
흑역사 14; 콜럼버스가 1마일을 헷갈린 결과
흑역사 15: 스페인과의 전쟁 호기를 날려 버린 아즈텍의 황제
흑역사 16: 200억 명의 신앙을 바꾼 헨리 8세의 이혼
흑역사 17: 일본 바깥으로 눈을 돌린 히데요시의 패착
흑역사 18: 발트 해 정복에 실패한 광기왕 칼 12세
흑역사 19: 식민지 국민들의 감정에 불을 질러 버린 조지 3세
흑역사 20: 외교 사절단을 군대로 착각하고 궤멸한 조지 워싱턴
흑역사 21~22: 영국 해군의 무패 신화를 망쳐 버린 제독들
흑역사 23: 탈출의 순간에도 화려한 마차를 고집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흑역사 24: 의사들이 ‘과잉’ 치료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조지 워싱턴
흑역사 25: 러시아의 추운 바람에 스러진 유럽 통일의 야망
흑역사 26: 콰트레브라에서 전투에서 미셀 녜 장군이 저지른 두 가지 실수
흑역사 27: 나폴레옹을 퇴위시켜 버린 미셀 녜의 착각
흑역사 28: 남부 연합의 연방 탈퇴가 10년만 빨랐더라면…
흑역사 29: 쇠기름 때문에 인도를 잃다
흑역사 30: 세계 경제를 움직이지 못한 남부 연합의 목화 제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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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알렉산드로스의 선택
정복왕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멸망시킨 후에 페르시아의 수도를 점령했고 새로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한집 살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리스인들에게는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이고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장려했고 옛 페르시아 제국에는 그리스의 가치들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주력했다. 수도에서 현안들을 마무리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방 정벌에 나섰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다음 인도를 향해 동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번 정복 전쟁 중에 수많은 전투와 포위 작전을 진두지휘했고, 그 바람에 30번도 넘게 부상을 당했다. 잦은 부상에 장사 없듯 결국에는 위대한 정복자도 잦은 부상과 고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 전쟁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중병을 얻은 뒤였다. 그때가 페르시아를 침략하고 고작 6년이 흐른 뒤였고, 그의 나이 36세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병세가 갈수록 깊어지자 장군들은 그가 없는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장군들은 후계자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병석에 누운 황제를 수차례 알현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식이 아들 한 명뿐이었는데, 후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는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왕비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어떤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어린 왕자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또 어떤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제국을 통치하고 보존하겠다고 제안했다. 심지어 얼마 후 왕위를 계승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장군도 일부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특정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할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자신이 깊은 병에 걸려 죽어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평소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미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