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공공도서관의 미래, 그리고 현재와 과거
Ⅰ. 공공도서관의 가치
Ⅱ. 도서관에 삶을 건 엄대섭
Ⅲ. 엄대섭이 생각한 공공도서관
Ⅳ. 민중 속에 뿌리내린 마을문고와 공공도서관
맺으며 ? 공공도서관, 엄대섭이 꿈꾼 지식나눔터
보론 1. 엄대섭 연보
2. 토크콘서트 ?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
교육열의 바탕을 이룬 도서관
지금으로부터 고작 60여 년 전 우리나라는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한국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되어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전세계에서 원조를 받는 나라였다. 지금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기까지엔 선배 어른들의 엄청난 교육열과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바탕이 되었다. 그 교육열을 이끌었던 밑바탕에는 도서관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민중 속에 뿌리내린 마을문고와 공공도서관
60년대 초 우리나라에 공공도서관은 겨우 18개 밖에 없었다. 우리 국민들의 독서열을 끌어올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였다. 그리고 그것마저 자료 이용과 열람공간이 아닌 단순한 공부방에 그쳤다. 도서관 운동가 엄대섭은 우리 현실에 맞는 도서관 모델인 마을문고를 만들었다. 전국 3만 5천여 개 농·어촌 자연부락 대부분에 책장과 책을 보급해서 지적 욕구를 끌어내어 독서능력을 끌어올렸다. 거기에 더해 공부방 구실에, 폐가제로 운영되던 공공도서관을 정보자료 이용공간이란 제 역할을 찾아 주었다. 하지만 도서관을 이용하는 많은 이들뿐만 아니라 8천 여개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에서 일하는 이들조차 엄대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도서관 운동에 삶을 건 엄대섭
엄대섭은 1921년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겨우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는 16살 어린 나이에 헌 옷 수집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던 1950년 부산의 헌책방에서 <도서관 경영의 실제>란 책을 읽고 평생을 도서관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는 1951년 여름 울산에서 ‘사립 울산 무료도서관’의 문을 연 뒤 1953년 경주로 가서 경주시립도서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1955년 한국도서관협회의 재창립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문교부와 함께 농촌지역에 책보내기 사업을 벌인다. 농촌지역 독서능력을 끌어 올릴 방법을 찾던 중 ‘마을문고’를 고안하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