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예언, 일반적 믿음을 둘러싼 다성적인 사유들
『예언에 관하여』는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언과 운명에 대한 키케로 형제의 대화를 담고 있다. 먼저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가 스토아학파의 입장에서 예언술을 옹호하면서, 예언술이 철학적 원리와 합치한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친다(제1권.
미신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연학적으로 말해서, 운명은 사건들의 영원한 원인, 왜 이전에 지나간 일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왜 현재 있는 일들이 그러한지, 왜 나중 일들이 그렇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찰에 의해서도, 어떤 일이 일반적으로 각각의 원인을 뒤따르게 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걸 확신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광기를 통해서나 자면서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이런 원인을 분간한다는 것은 아주 그럴 법한 일입니다. (본서 1권, 122쪽
이후에는 키케로가 아카데메이아학파의 방법으로 우선 예언술 일반을 공격하며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비판하는 식으로 전개된다(제2권.
만일 모든 일이 운명에 따라 일어난다면, 예언술은 아무 일에 있어서도 우리로 하여금 좀 더 조심하라고 충고해 줄 수가 없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 테니까. 한편 그 일이 회피될 수 있다면, 운명이란 건 없게 된다네. 이 경우에도 예언술은 존재하지 않게 되네. 왜냐하면 예언이란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지. 한데 ‘확실하게 일어날 사건’ 따위는 없다네. (본서 2권, 145~146쪽
이런 구도를 놓고 예전에는 나중에 발언한 사람이 이긴 것으로, 미래를 예언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는 제2권의 주장이 바로 저자의 믿음이라고 보았다. 『예언에 관하여』의 집필 의도는 ‘대중의 무지에 대한 이성적 반박’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체로 제1권의 주장이나 제2권의 비판이나 다 일리가 있기에, 저자 키케로가 양쪽을 공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