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의 주요 피화인이라 할 수 있는 이발(李潑의 호 동암(東巖과 이길의 호 남계(南溪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따 제목으로 삼았으나, 이 책은 이발·이길의 피화 사실에만 주력하지 않고 기축옥사 피화인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그간 다산학회에서 편집한 ??여유당전서보유?? 2권에 수록된 ??동남소사?? 서두에 ‘열수 정약용 편집’이란 문구가 있어, 이 책의 편자가 다산 정약용(丁若鏞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정약용이 아니라 여러 명의 인물들이 몇 세기에 걸쳐 꾸준한 증보와 함께 편집한 것들로 짐작된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우선 기축옥사 발발의 연원은 동·서 분당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선조대 동·서 분당은 비교적 조정과 화합이 가능했던 초기의 발화점을 지나 점차 상대 세력에 대한 강력한 응징과 완전한 정치적 배제를 목표로 한 정치 투쟁으로 증폭되었고, 급기야 기축옥사로 폭발하였다. 기축옥사 당시 이발, 이길, 정언신, 백유양, 최영경, 정개청 등 피화인(被禍人들은 역모의 가담 여부와는 별도로 역적 정여립과 친밀한 교유를 지속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역률로 처단되고 가산은 적몰되었으며 처자에 대한 노륙(?戮이 시행되었다. 특히 이발과 이길의 경우 혈육인 9족에 문생(門生들까지를 합해 10족을 멸하였다는 말이 돌 정도로 그 일문이 모두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정여립과 친히 교유하였으니 그의 역모를 몰랐을 리가 없다는 추정만으로 혹형이 가해진 기축옥사는, 그래서 부당하고 불공정한 ‘원옥(?獄’이라는 비판이 내내 뒤따랐다.
17세기 조선의 당쟁은 예송과 환국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갈등과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중앙 정계에서 북인이 세력을 잃고 퇴출된 뒤, 기축옥사를 소환하여 그 정치적 의미를 재규정하고 피화인들의 신원을 추진해 나갔던 것은 남인이었다. ??동남소사??는 동·서 분당, 기축옥사의 발발과 전개, 무고자(誣告者 처벌과 피화인 신원 등 16∼17세기에 걸친 당쟁의 쟁점을 동인의 시각, 그에 이어지는 남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