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북학의》를 이해하는 길라잡이
1장 북학에 대한 논의
1.왜 북학인가?
2.북학의를 임금께 올리면서
2장 제도와 풍속의 개혁
1. 과거 제도
2. 관직
3. 군대 제도
4. 장례 제도
3장 사회 기반 시설의 개선
1. 수레의 활용
2. 배의 활용
3. 도로 정비
4. 다리 설치
5. 벽돌 제작
6. 성곽 구축
4장 농업과 목축의 장려
1.농기구에 대한 여섯 가지 원칙
2.밭
3.거름
4.목축
5.소
5장 상업과 교역의 장려
1. 사대부의 상거래 참여
2. 시장과 우물
3. 중국과의 교역
4. 중국어를 공용어로
5. 통역
6장 생활용품의 개선
1. 간장과 된장
2. 골동품과 서화
3. 종이
4. 가옥
5. 약재
박제가, 북학에서 길을 찾다
박제가 연보
당시 조선은 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고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조천사로 부르고 청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을 연행사로 낮춰 불렀는데, 박제가는 연행사의 일원으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다. 1차 연행이 1778년, 2차와 3차 연행이 1790년, 4차 연행이 1801년에 있었는데, 특히 1778년 처음 연행을 다녀와서 보고 들은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 《북학의》다. ‘북학파’라는 명칭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북벌’이나 ‘북학’이 다 같이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방법은 서로 반대였다. 박제가처럼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자는 입장에서는 ‘북벌’은 실천은 없고 구호로만 그친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으며,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당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그래서 현실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을 한다면 양반일지라도 도태시켜야 한다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학문을 오직 개인의 출세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풍토를 전면으로 비판했다. 《서경》에 ‘정덕이용후생’이라는 말이 있다. ‘정덕’이란 유교에서 추구하는 윤리적 가치인 올바르고 관용적인 행동을 말하며 ‘이용’과 ‘후생’은 백성의 풍요로운 생활을 뜻한다. 당시 전통적 학설은 정덕이 제대로 서야 이용후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는 이용후생, 곧 경제가 넉넉해야 올바른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다시 말하면 정덕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이용후생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박제가는 정덕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정덕의 훼손도 염려했던 균형 잡힌 개혁가였다.
박제가가 1779년 6월 이덕무?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검서관이 된 것은 그의 삶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서얼들을 검서관에 발탁하는 정책을 시도한 덕분이었다. 정조를 자주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