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장 정조주역으로 소통하다
지나간 말과 행동을 많이 알아 그로써 덕을 쌓는다
주역으로 잘못을 바로잡고 허물을 고친다
2장 이순신의 주역과 선조의 주역
임금을 만난 듯하고 밤에 등을 얻은 것과 같다
일을 도모할 때는 처음에 잘 꾀해야 한다
낮에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들을 모이게 한다
3장 숙종주역으로 세력 균형을 꾀하다
거친 것을 품에 안고 맨몸으로 강을 건넌다
나라를 열고 집을 계승할 때는 소인을 쓰지 마라
비가 내리니 돼지가 뒤집어쓰고 있던 진흙이 씻긴다
군자가 뜻을 한번 세우면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4장 영조주역으로 탕평을 이루다
묵묵히 이루어가면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
소인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준다
너무 높이 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5장 세조주역으로 자신의 업보를 돌아보다
문신이 주역을 모르다니 술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
군자는 하늘을 본받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
바닷물에서 물을 본 자는 물의 깊음을 말하지 않는다
6장 정종주역으로 마음을 비우다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에 이른다
7장 성종주역으로 앞날을 경계하다
여윈 돼지가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아니한다
솥이 뒤집어져 공속을 쏟으니 그 모양이 좋지 않다
부부가 있은 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다
치세를 이루기는 어렵고 난세를 이루기는 쉽다
8장 연산군주역의 경고에 귀를 닫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창문을 뚫는다
주머니를 잡아매듯 입을 다물게 하니 성군의 길은 요원하다
9장 중종주역으로 간신을 멀리하다
돼지의 어금니를 빼어 말리니 길하다
곧음을 굳건히 하여 사물의 근간이 되게 한다
짐을 지고 수레를 타니 도둑이 이른다
10장 광해주역으로 중립을 이루다
지나치면 반드시 후회하니 치우치지 말고 기울지 말라
마른고기를 씹다가 화살을 얻으니 이로움으로 여기면 길하다
11장 인조주역으로 굴복하다
서로 뜻이 맞으니 위에서 은혜를 베푼다
“《주역》을 모르는 문신들에게는
술로 벌을 주어야 합니다”
정조와 영조, 숙종, 세조 등 조선의 모든 군왕은 《주역》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민생을 돌봤다. 왕은 물론이고 학문을 갈고 닦은 문무관들이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주역》으로 자신의 점괘를 꼽아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순신 장군 또한 《주역》으로 점을 쳤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전쟁을 앞두고 점을 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오지만, 어째서인지 이 같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환국정치의 달인으로 알려진 숙종의 경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꾀하는 과정에서 《주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서인의 세력이 커지면 판을 뒤집어 남인을 등용했고, 이 과정에서 남인의 세력이 기세등등해지면 또다시 판을 뒤집어 서인을 중용했다. 이 과정에서 송시열의 아들 송기태가 숙종에게 탄원서를 올리자, 숙종은 《주역》의 지수사괘地水師卦 상육 효사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다. ‘대군大君 유명有命 개국승가開國承家 소인물용小人勿用, 큰 위업을 달성한 임금에게는 명이 있으니 나라를 열고 집안을 이어가는 데 소인을 쓰지 말라’는 뜻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량이 좁은 소인을 곁에 두지 말아야 하니, 그래서 ‘소인물용’이라 한 것이다. 숙종은 《주역》을 통해 송기태의 아버지인 서인 송시열을 뛰어난 선비로 치켜세우고 그와 대립했던 윤휴와 남인을 소인으로 규정했다.
그런가 하면 집권 초기부터 탕평책을 추진했던 영조 또한 《주역》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어갔다. 1736년 11월 17일 《영조실록》을 보면 탕평책에는 찬성하지만 부작용을 우려하는 이덕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추진하려는 영조가 《주역》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내용이 나온다.
이덕수는 천화동인괘 상전에 나오는 ‘천여화天與火 동인同人 군자이君子以 유족類族 변물辨物, 하늘과 불이 동인이니 군자는 이로써 무리를 모으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