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를 펴내며
화보
전쟁 중 철원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 김영규 제공
제1부 전쟁의 발발과 정전
6·25전쟁의 기원과 발발: ‘복합전’적 성격과 관련하여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휴전협상에서 북·중·소 3국의 태도 변화 및 결과
- 김동길 (북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정전협정과 전쟁의 유산
- 김보영 (인천가톨릭대학교 강사
제2부 철원지역의 전투와 지역민의 삶
美軍 기록을 통해서 본 백마고지 전투
-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연구사
1951~1953년 화살머리고지 전투의 시기별 양상과 특징
- 박동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6·25전쟁과 철원지역민들의 삶
-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제3부 정전체제의 변화와 극복
6·25전쟁 전사자 유해 교환과 비무장지대 발굴 재조명
- 조성훈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중국군 최종 철군과 북중관계
- 한상준 (아주대학교 사학전공 교수
한러관계의 역사적 고찰과 한반도 평화
- 이재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디지털인문한국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정전체제 극복과 남북관계 전망
- 이상철 (전쟁기념관 관장
부록
태봉학회 소식
올해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6·25 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경제적 피해도 막심하였다. 정전 후에는 분단이 고착되었고, 대립과 분쟁이 격화되었다. 오늘날 남북한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들의 연원은 6·25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25 전쟁 중 철원은 이른바 철의 삼각지 중의 한 곳으로서 중부전선 최대의 격전지였다. 백마고지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고지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철원군민들의 삶의 터전은 파괴되었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옛 철원 중심지의 무너진 건물들은 전쟁의 참상을 알려 주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철원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철원은 군사적 대치의 현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철원은 남북화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2018년 4월 27일의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및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화살머리 고지의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이 그 예이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태봉의 철원도성에 대한 남북공동연구를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봉학회에서는 6·25 전쟁 발발 70년에 즈음한 학술회의를 구상하였다. 한국군사사학회 이재범 회장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소장의 도움으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영규 소장은 강원서부보훈지청과 철원군의 후원을 얻었으며, 여러 가지 실무를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2020년 7월 14일 철원에서 “6·25 전쟁 7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철원”이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게 되었다.
학회에서는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제 2부, 제 3부과 6·25 전쟁을 조감할 수 있는 논문들(제1부을 모아 총서 제2권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6·25 전쟁 중 철원 지역의 이모저모를 촬영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