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상처와 고난에서 자긍심을 싹틔우다: 김순애의 반은 좋고 반은 안 좋았던 삶
원가족
아버지, 술만 춰가지고 오면 뚜드려 패고│잘 좀 살지 왜 다들 이혼하냐구요
서울 식모살이와 공장 생활
시집살이의 고됨과 부부생활
쌀 많은 집이 부러웠는데 말이 씨가 돼서│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경제적 자립을 하다│싫지만 남편에 대한 포기는 안 되고│부부간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성생활│아들이 두부랑 축사 받아서 하고
삶을 바꾼 여성농민회 활동
농민회 안 했으면 이렇게 강단 있겠어요?│못 배운 서러움과 울화│쉬다보면 길이 또 나온다고│현재의 농사, 퇴임 후의 계획│학교와 교회에 대한 양가감정
운동과 죽음에 대한 성찰
아직 풀리지 않는 모녀관계
후기_진심과 열정이 상처로 주저앉지 않기 위하여
2부 가난이 씨 뿌린 예민한 삶과 농촌에서 일군 보람의 나날들: 정금순이 말하는 생애
원가족에 대한 애환
순종 요물로만 자랐어요│부모가 사랑 줬는데도 형제간 우애롭지 않아│1970년대, 광주 여고 시절
첫 결혼 그리고 이혼
세신노동, 골병과 당당함
농부와 재혼하며 시작된 나주 생활
농을 병행하며 대농을 꾸리다│나락 농사 하는 과정│청각장애 신랑이 이장을 열심히 하고
농민회와 부녀회 활동, 고생과 재미
새엄마, 새 가족 되기
‘할머니, 왜 이모하고 엄마하고 성이 틀려요?’│성질 급한 남편하고 함께 살기
농민수당이 좌우할 농촌의 미래
내가 겪은 광주항쟁
후기_시행착오는 제대로 직면하면 힘의 원천이다
평생 억척을 떨고 살았지요
“나는 시골서 반듯한 집에, 배 안 곯는 집에 사는 게 꿈이었어요. 엄마도 그래서 나를 그런 집에 시집보낸 거고, 나도 좋았던 건데…… 뒤주 큰 집 찾았더니만 하나도 안 틀리게 그대로 된 건데, 그 집에서 종살이만 한 거지.”(김순애
1959년생 김순애의 삶은 반은 좋고 반은 안 좋았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큰딸로 자랐으며, 아홉 살 때부터는 가난한 살림까지 도맡았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독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회고한다. 집에서 벗어나고서는 서울에서 1년간 배곯는 식모살이를 거쳐 양말 공장에서 7년간 일했다. 그 공장 시절이 평생 제일로 신나고 즐거운 때였다고 한다. 길가에서 하꼬방(판잣집 생활을 하던 엄마에게 동네 가운데 집도 사주고, 자기 손으로 돈 벌어서 자기를 위해 썼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와 시집살이를 하면서부터는 다시 고생이 시작됐다. 드센 시어머니를 만나 험한 욕을 말끝마다 듣고 두드려맞기도 하는 등 구박을 받으면서도 시집 식구를 위해 농사짓고 가사노동을 했다. 남편의 외도는 서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 시어머니가 와병 중일 때도 남편은 다른 여자를 찾곤 했다. 마음을 가누기 힘든 일이었지만, 김순애는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장사를 시작해 자립하게 된다. ‘이혼해줄래, 장사를 하게 해줄래’라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이후 그는 순두부 백반집을 차리고 버섯장을 짓고 두부 공장을 하는 등 자기 손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일구게 된다.
그러면서 김순애는 복잡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남편과 일찍 이혼하지 못한 게 한이라고 하면서도 친정 남매들의 이혼은 인정하지 못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시어머니와 그렇게 갈등을 겪었는데도 마지막에는 정성스럽게 병수발을 들었다. 그 덕에 자신이 좋은 며느리로 기억되고 사람들 입에도 오르내린다는 사실에 고마워하기도 한다. 남편 때문에 속을 그렇게 앓았는데도 ‘잘 해봐야지’라는 생각을 남겨두고 있다. 어릴 적의 가난이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