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의 글|‘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정출헌?5
들어가는 말|조광조의 개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9
1장 사화(士禍의 시대에 태어나다
1. 무오사화, 훈구파와 사림파의 첫 충돌 17
2. 갑자사화, 폐비 윤씨의 죽음과 그 후폭풍 25
3.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 35
2장 역사 속에 등장하다
1. 평생의 스승, 김굉필과의 만남 45
2.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다 60
3장 성리학적 개혁을 꿈꾸며 비상하다
1. 경연, 왕을 철인(哲人으로 만들기 91
2. 소격서 혁파, 왕도정치의 첫걸음 102
3. 『소학』과 향약 보급,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 111
4. 현량과 실시, 개혁의 후원군을 얻다 116
4장 기묘사화, 개혁의 정점에서 추락하다
1. 개혁의 완성, 정국공신 개정 127
2. 11월 15일 밤, 중종의 역습 135
3. 조광조를 둘러싼 공방 140
4. 중종의 진심 144
5. 뜨거웠던 감자, 현량과의 폐지 157
6. 조광조, 개혁가의 최후 163
5장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기억되다
1. 중종, 조광조를 끝까지 부정하다 169
2. 인종, 조광조를 복권시키다 177
3. 선조 대, 유생들의 문묘 종사 청원 180
4. 광해군 대, 문묘에 종사되다 184
5. 사림파의 영수들, 조광조를 기억하다 187
6. 정조, 조광조를 존숭(尊崇하다 190
6장 성리학적 이상을 함께 꿈꾼 사람들
1. 기록으로 부활한 기묘사림 195
2. 기묘팔현, 조광조와 함께한 사람들 201
7장 조광조를 기억하는 서원들
1. 심곡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서 살아남다 218
2. 죽수서원, 육신이 죽은 곳에서 부활한 정신 221
3. 도봉서원, 당쟁의 중심에 서다 223
맺음말 | 중종과 조광조의 ‘위험한 동거’ 231
주석 238
주요 저술 및 참고문헌 244
이미지 출처 246
연보 248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현량과 합격자 28인 251
찾아보기 261
최고의 조선시대 전문가, <역사저널 그날>의 신병주 교수가 들려주는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 조광조 이야기
조광조(1482~1519는 조선시대, 나아가 한국 역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개혁가다. 조광조는 가슴에 성리학적 이상을 품고 성리학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인생을 바쳤으나, 그의 이상은 당대 조선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꿈이었다. 조광조의 이상은 결국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됐지만, 역사는 그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역사저널 그날>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최고의 조선시대 전문가, 신병주 건국대학교 교수는 이 책에서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그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짚는다.
조광조가 태어난 15세기 후반은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성종 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는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훈구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고 오히려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사건인 사화가 발생했다. 특히 연산군은 무자비한 독재 정치를 일삼으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면 죽은 사람까지 부관참시할 정도로 가혹했던 연산군의 폭정은 큰 반발을 불러왔고, 마침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중종은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사화의 시대’에 성장한 조광조 또한 성리학 이념으로 완전 무장한 채 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조광조,
성리학적 이상을 꿈꾸며 비상하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 길에 올랐던 사림파의 핵심 인물,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갈고닦았다. 학문에 전념하던 그는 29세인 1510년(중종 5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고, 34세가 된 1515년(중종 10년에는 알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다.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를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