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학』인가?
『소학』은 조선시대 사림파 선비들의 학문적 출발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선 유학자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시작과 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훤당 김굉필 같은 이는 평생을 소학동자로 자처했고, 남명 조식은 『소학』 외에 더 이상 힘쓸 곳은 없다고 단언했기도 했다. 이익 또한 그러한 유학자로서의 자각을 담아 『소학질서』를 남겼다. 『소학』에 대한 독서와 사색의 결과를 비망기의 형태로 담아낸 것이다.
『소학』은 문자 그대로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와 같은 기본예절을 배우는 어린 학습자들을 위한 수신서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경서나 역사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한·당·북송 시대 인물들의 일화를 통해 그 내용을 실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소학』이 편찬된 이후 중국에서도 30여 종의 주석서들이 나왔고, 조선에서는 중국의 여러 주석서들을 수입하는 한편으로 직접 주석서를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서와 언해서를 간행토록 함으로써 『소학』의 일반 보급에도 힘썼다.
『소학질서』 ― 전통의 계승과 혁신을 아울러 천명하다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 『사칠신편四七新編』, 『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 등을 저술하여 퇴계 학문을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학질서』에서 퇴계의 뜻을 묵수하지만은 않았다. 이 책의 곳곳에서 그는 주자의 뜻을 높이면서 퇴계의 말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주자朱子나 정자程子의 주석이나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치에 닿지 않거나 억설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는 재삼 숙고하여 나름의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학문태도와도 무관치 않다. 아시다시피 이익은 다산 정약용에게서 꽃핀 기호남인 실학의 근간을 수립한 인물이다. 근대적 합리성과 실용을 중시했던 그는 정통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납득이 되지 않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