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안내서에서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관한 심리와 당대 사회 변화를 볼 수 있다.
당시의 각종 안내서에는 식민지지배의 성과로 포획된 ‘신문명 일본’과 역사적 유적들에 투영된 식민지 조선의 ‘정체된 고귀한 야만’이라는 역학적 구도가 암암리에 구도화 되어 있음도 살펴 볼 수 있다.
본 역서에서 다룬 <부산안내>(원제목는 총 4종류이나 총독부 철도국이 발행한 1929년, 1930년, 1932년의 3종류와 부산관광협회에서 발행한 1936년 1종류이다.
앞의 총독부 철도국이 발행한 <부산안내> 3종류는 내용 상 커다란 차이는 없지만 각종 통계, 전차, 자동차, 기차, 배편 등의 운임에 차이가 있어 당시의 물가나 교통망, 인구 등의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미세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서술내용에 약간의 차이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1929년 판 ‘절영도(지금의 영도’ 설명 내용 중 “국유의 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속칭 마키노시마라 불리고 있다”라고 되어 있지만, 1930년, 1932년판에는 “이왕가(李王家의 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속칭 마키노시마라 불리고 있다”고 기술되어 조선의 왕조를 비하하는 형태로 소개되어 있다.
왜 부산인가?
조선말 첫 개항지였던 부산은 일제강점기의 시작이자 마지막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굴곡의 역사가 남아있다. 한일병합 이전 이미 일본전관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제국 일본의 전초기지로서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다. 현재에도 많은 역사유적이나 유물 등 도처에 흔적이 남아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역사투어리즘(History Tourism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