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의 유명한 공식,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La Femme n’existe pas” 또는 “사람들은 그녀를 여자라고 말하면서 그녀를 모욕한다(on la dit-femme, on la diffame”에서 볼 수 있듯이 라캉은 여성성이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를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여자를 규정한다. 존재하지 않는 여자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중심과 부재 사이에’ 위치해 있다. 여자는 하나의 중심으로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재하지도 않는다. 여자는 중심과 주변, 존재와 비존재의 구분 자체를 교란하고 무력화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성의 모호한 흔적에 대해 무조건 침묵해야 할까? 존재하지 않는 여자에 대해 그녀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던 프로이트는 한편으로는 여성성이라는 검은 대륙을 탐험하는 계몽주의자의 입장을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성의 근본적인 모호성을 겸허히 인정한다. 요컨대 프로이트는 여성성의 비합리적인 측면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면서도 합리화되지 않는 잔여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라캉이 보기에 이러한 프로이트의 태도는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과 여자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물학적, 사회학적 관점과 구분되는 정신분석적 통찰을 남겼지만 ‘여자가 되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자신이 정신분석은 여자가 무엇인지 기술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떻게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는지를 추적할 뿐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추적 과정 자체가 ‘여자 되기’의 비일관성을 남근주의적인 일관성으로 고정시켰다. 그렇다면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스캔들로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여자에게 목소리를 돌려줌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