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극복은 ‘불안’ 대신 ‘신뢰’를 쌓아나가는 데서 출발
동서독의 ‘실용적인’ 협력관계 일군 평화정치가들에 주목
냉전과 분단이 이념과 체제 대결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을 거쳐 분할 점령 및 관리 이후 분단을 맞았지만, 오스트리아는 10년에 걸친 국제 협의와 국내 조정 끝에 1955년 주권을 되찾았다. 유럽의 냉전 질서를 강화하고 동서독 사이의 대결과 적대를 키운 것은 결국 ‘불안’이었다. 독일을 중립화하는 방안이 동서 양 진영에서 단일국가 독일의 방안으로 논의되고 제시되었지만, 동유럽에서 친소 정권의 탄생, 사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한 사통당(SED의 결성, 한국전쟁 발발 등은 서방측에 공산화의 우려와 상대의 진의에 대한 의심을 키웠고 결국 동서독 분단은 현실이 된다. 분단 이후 국면의 전환을 모색한 것은 양 독일 국가의 정치가와 주민들이었으며, 특히 1970~80년대 동방정책을 주도한 평화정치(가들은 ‘불안’에 침몰하지 않고 상대와 신의와 선의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다. 그것은 긴장을 해소하고 위기를 예방하며 갈등을 조정하는 대화와 협상의 연쇄에 다름 아니었다.
동서독 협력관계에서 주목할 해는 1969년과 1982년이다. 서독에서 사민당(SPD 정부가 본격적으로 ‘접근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며 ‘동방정책’을 (1969년 개시하고 우파[기민련(CDU]로 정권이 교체된 (1982년 이후에도 동서독의 신뢰와 협력은 중단 없이 지속했다. 동방정책의 토대를 놓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와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의 상징적 인물이 된 헬무트 콜(Helmut Kohl. 이 두 동방정치가들은 정파를 뛰어넘어 동방정책의 계승과 연속을 보장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우파 연정의 정권 교체 이후에도 파트너로 참여한 자민당(FDP과 기민련은 동방정책을 이어갔으며 자민당의 당대표이자 탁월한 협상정치가인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는 외무부장관직을 지속하면서 동독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