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종손(從孫이종찬
첫머리에
서문: 성재 이시영은 누구인가
제1장출생가문과 성장기
제2장급변하는 내외정세 속에서
제3장신민회 참여, 망국 겪으며
제4장6형제 함께 망명, 삼원보에 터 잡아
제5장신흥무관학교 창설하고 운영
제6장베이징에서의 활동
제7장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제8장임시정부 떠났다가 다시 참여
제9장중국인의 한국사 왜곡에 ??감시만어?? 집필
제10장임시정부의 이동 시대
제11장일제 패망과 환국 전후
제12장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제13장민족사의 불행과 비극 앞에서
제14장서거와 국민장 그리고 추모 사업
성재 이시영 선생 연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우리나라 최고 명문가의 하나로서 삼한갑족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이시영 선생의 6형제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탄되자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40여 명의 일가족이 만주로 망명하였다. 나라의 은덕을 가장 많이 받은 자신들이 망국의 불행 앞에서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홀연히 떠난 6형제 중 살아서 고국 땅을 다시 밟은 사람은 이시영 선생뿐이다. 나머지 다섯 형제는 이역 중국 땅에서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일제 경찰에 고문당해 죽었다.
이시영의 형인 이회영 선생은 형제들과 중국으로의 망명 계획을 의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國恩과 세덕(勢德이 당대의 으뜸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불어 안락과 근심을 같이 할 위치에 있다. 지금 한일합병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만일 뒷날에 행운이 있어 왜적을 부숴 멸망시키고 조국을 다시 찾으면, 이것이 대한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공白沙公(이항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노라.
이회영 선생의 이 같은 말에 형제들은 아무 이의 없이 뜻을 같이하여 일가족 전체가 중국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남대문을 나서면서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돌아올 날이 없다면 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문을 나선 시간으로부터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원천우인(怨天尤人;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함은 아니하리라.
이 다짐과 같이 이시영 선생은 만 35년간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독립운동 외길을 걷다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76세의 노구를 이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