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장 조국의 흙과 명주 태극기
1. 운명의 밤 | 2. 독립운동가 아버지, 한흥교
2장 중일전쟁과 예술구국운동
1. 예술구국운동의 첫발 | 2. 항일연극대와 전시공작간부훈련단
3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국광복군
1. 나월환과의 운명적 만남 | 2. 예술을 무기로 한 항일운동 | 3. 한국광복군으로의 편입
4장 광복과 귀국, 그리고 문화예술 교육의 실천
1. 30년 만에 밟은 조국 땅 | 2. 고향에서의 예술과 교육
부록: 한형석의 예술 작품 및 기타 자료
한형석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아버지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예술 구국에 매진하거라”
항일예술가 한형석,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예술로 맞서다
아버지 한흥교의 뒤를 따라 항일운동에 투신할 방법을 고민하던 한형석은 1929년 노하고급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조성환의 조언으로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 진학한다. 한형석은 중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예술적 재능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적 단결에 쓰겠다는 자신의 투쟁 노선을 정한다. 이것이 예술구국운동가 한유한의 탄생 배경이다.
“우리는 한국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_압록강 행진곡
우리가 부를 때는 군가가 아니고 주술이었다_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 김유길
한형석이 한국독립군으로 참여할 당시는 중일전쟁 발발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운동세력에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던 시기로, 전면적인 대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인무장역량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한국광복군이 차례로 창설됐다. 한형석은 당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한인무장역량을 집중·고취시키기 위해 중국 관내에서 적극적인 항일예술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들로 <신혁명군가>, <승리무곡>,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을 창작하여 궁핍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원들이 지치지 않도록 사기를 드높여서 한인무장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 중국에 울려 퍼진 삼천만 조선민족의 노래 <아리랑>
1940년 5월 15일 중국 시안에서 초연한 삼천만 조선민족의 염원을 담은 항일가극 <아리랑>은 당시 현지에서 발행되던 신문지면에 연일 보도되며 주목받았다.
매일 아침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리랑 노랫소리는
중국인들이 한인 혁명가들을 동정하도록 만들었다_<옹화도문잡지>, 1947
항일가극 <아리랑>은 한국민족의 전통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신선한 극 구성으로 작품성뿐만 아니라 한·중연대의 모범사례로 높은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