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떠나는 자, 남는 자, 사라진 자
1장 폐허에서 : 두 번의 피난과 복귀
1. 첫 탈출 행렬 : 인천항에서 떠난 사람들
2. 두 번의 피난 : 인천시민의 피난기
3. 돌아온 인천 피난민 : 원조와 구호의 ‘신화’를 보다
4. 점령지 인천에서, 편지를 보내다
2장 불타는 인천, 사라진 사람들
1. 인천소년형무소와 사라진 사람들
2. 월미도가 불타다
3. 불타는 인천역과 시가지
2부 수용에 갇힌 포로와 미군기지
3장 포로들이 갇히다
1. 벌거벗은 자, 죽은 자, 살아남은 자
2. 유엔군 2인천임시포로수용소와 포로들
3. 10부평기지포로수용소 이야기
4. 인천항에서 : 송환과 귀환의 길목
4장 인천, 미군기지화
1. 부평기지의 복원과 확장
2. 강화도와 인천항 기지 변화
3. 월미도 미군기지 뒷이야기
5장 원조와 기지의 역사
1. 인천의 재건 : 대한원조의 ‘신화’
epilogue
부록 참고문헌
인천 주요 연표
주석
1부 : 전쟁,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인명 손실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활발하게 공격을 압박했다.”
77기동대장 제임스 도일 제독(성조지, 1950. 9. 17
“공격이나 폭격 : 어떤 수단을 써서든 도시와 마을, 주택과 건물이 보호받지 못한다면 금지되어야 한다.” 국제인도법 제25조(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
월미도 폭격 작전 이후 제임스 헨리 도일(1897∼1981은 폭격 과정에서 민간인이 희생된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해 한국전쟁을 끝으로 퇴역했으며 민간인과 그 구역에 폭격과 공격을 금지한 제네바협약(1949과 국제인도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전쟁영웅’이었다. 월미도 작전에서 최우선은 민간인보다 작전의 성공이었다. 1950년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극동총사령부와 극동공군은 인천상륙작전 관련 작전계획서에 월미도의 민간인 예상 피해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계획서에 인천 시내의 ‘전술폭격’을 언급했지만 실제 ‘융단폭격’과 기총소사가 전개되었다. 결국 민간인 지역에서 피해가 급증한 이유라고 하겠다. 미국 자료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배제된 월미도 주민들의 피해 상황 등을 직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특히 월미도와 인천에 폭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미군에서 폭격 피해를 어떻게 조사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책의 1부 1장에는 전쟁 발발 직후 북한지역 피난민의 유입과 주한미국인의 대피과정, 돌아온 피난민들의 원조와 구호 등을 살펴보고자 했다. 원조와 구호는 1950년 12월부터 1953년 3월까지 주한유엔군민간원조사령부 경기도와 인천팀에서 작성한 <주간보고서>, <반월간보고서>, <월간보고서>에서 인천시의 행정기관 상황, 보건, 복지, 노동 등 여러 주제들을 선별해 분석하고자 했다. 2장에는 좌우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폭격의 피해 등을 꼼꼼하게 살피고자 했다. 전쟁초기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인천소년형무소, 동인천경찰서 유치장 외에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