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믿지만 너는 믿지 않는 그것을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대한 ‘이성’의 승리
1761년. 프랑스에서는 장 칼라스라는 60대 개신교 신자의 장남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자살이었으며, 가족들은 이 사건이 가문의 수치가 될까 걱정해 덮으려 했다. 그러나 당국은 소문에 근거해 그 젊은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762년 3월 장 칼라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을 당했다.
이 소식을 같은 해 3월 말에 전해들은 볼테르(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는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고, 가톨릭 신자인 판사들의 판결이 종교적 편견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점을 깨닫고 분노하게 된다. 이후 볼테르는 장 칼라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며, 파리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도 줄기차게 편지를 쓰며, 재판에 대한 항소를 요청했고, 그리하여 마침내 1763년 3월 툴루즈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가 허용되게 된다.
그리고 이 와중에 볼테르는 바로 저 유명한 《관용론》을 저술, 출간하게 되는데, 그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칼라스 판결의 전후사정을 설명하면서 툴루즈라는 지방도시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광신”을 강조하고, 25개가 넘는 후속 장들에서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는 더 넓은 의미의 선언문을 제시한다. 《관용론》의 출간과 대단한 성공은 정치적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칠 만큼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마침내 1764년 6월 툴루즈 법원의 판결이 뒤집히며, 칼라스가 처형된 지 3년이 지난 1765년 칼라스의 유족들은 모든 혐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반계몽주의 세력에 대해 ‘이성’이 거둔 승리로, 볼테르는 펜의 힘으로 칼라스 가족을 구한 사람으로 칭송받게 된다.
“‘나는 믿지만 너는 믿지 않는 그것을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