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말년 작품인 『필레보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초.중기 대화편과는 다른 지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대화편에서의 좋은 것에 대한 논의는 특히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서 논의된 ‘좋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필레보스』는 『국가』와는 다른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에서는 “좋음 자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필레보스』에서는 “무엇이 사람의 혼의 상태로서의 좋은 것, 혹은 인간의 소유물들 중에 가장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필레보스』에서는 ‘좋음의 이데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와 달리 『필레보 스』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의 본으로서의 그것의 기능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레보스』의 문제는 그와 정반대이다. 이 대화편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 일시적이며 순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어떻게 훌륭하게 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 것이다. 따라서 『필레보스』는 『국가』를 비롯한 중기 대화편에서 전개된 형상들에 대한 논의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삶을 가능한 한 훌륭하고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필레보스』에서는 좋은 삶의 실현에 대한 플라톤의 관심이 자연 혹은 우주에서 온갖 좋은 것이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점에서 『필레보스』는, 주로 인간사에 한정된 소크라테스적 관심의 울타리 속에 있었던 초.중기 대화편에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특이성을 보여 준다. 플라톤은 우주론적 논의를 통해 우주 속에서 좋은 것들이 생성되는 방식이 ‘적도(適度: to metrion에 맞는 혼합’임을 밝히고, 인간의 좋은 삶도 이런 혼합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일관된 관심사인 좋은 삶의 문제에 대한
그의 말년의 해법은 중용에 비견될 적도의 사상이었다.
플라톤은 『필레보스』에서 즐거움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