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색인도
지도유설 | 팔도행정통계 | 도성도 | 경조오부
1-1 경원 | 1-2 온성·종성·경원 | 2-1 경흥·온성 | 2-2 회령·종성 | 2-3 무산 | 2-4 백두산 | 2-5 후주 | 2-6 후주 | 3-1 종성 | 3-2 부령·경성 | 3-3 무산 | 3-4 무산·갑산 | 3-5 후주·삼수 | 3-6 후주 | 3-7 후주 | 4-1 경성 | 4-2 무산·경성·길주 | 4-3 갑산 | 4-4 삼수·장진 | 4-5 후주·장진·강계 | 4-6 강계·후주 | 4-7 위원 | 5-1 명천 | 5-2 길주·단천 | 5-3 단천·갑산 | 5-4 장진·갑산 | 5-5 장진·강계 | 5-6 강계·위원 | 5-7 위원·초산 | 6-1 명천 | 6-2 단천·길주 | 6-3 북청·이원·단천 | 6-4 장진·함흥 | 6-5 장진·강계 | 6-6 강계·희천 | 6-7 벽동·초산 | 6-8 창성·벽동 | 7-1 북청·홍원 | 7-2 함흥·홍원 | 7-3 영원·함흥·정평 | 7-4 희천·영변·영원 | 7-5 운산·창성 | 7-6 삭주·구성·의주 | 7-7 의주 | 8-1 정평·영흥 | 8-2 영흥·맹산 | 8-3 덕천·맹산·개천 | 8-4 영변·안주·태천 | 8-5 철산·선천·정주 | 8-6 용천·의주 | 9-1 고원·문천·덕원 | 9-2 양덕·고원·문천 | 9-3 성천·은산·강동 | 9-4 숙천·영유·순안 | 10-1 통천 | 10-2 안변·회양·통천 | 10-3 안변·곡산·이천 | 10-4 수안·곡산·상원 | 10-5 평양·강서·황주 | 10-6 삼화 | 11-1 고성·간성 | 11-2 금성·회양 | 11-3 평강·철원·이천 | 11-4 신계·서흥·평산 | 11-5 봉산·재령·송화 | 11-6 풍천·장연 | 12-1 간성·양양·인제 | 12-2 양구·인제·춘천 | 12-3 영평·연천·포천 | 12-4 개성·장단·배천 | 12-5 해주·강령·옹진 | 12-6 장연·옹진 | 13-1 강릉 | 13-2 강릉·평창 | 13-3 홍천·횡성 | 13-4
3.1운동 100주년 기념작!
“하나된 우리 땅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준다.”
옛 지도 그대로 소장하는 원판 대동여지도 축쇄본
160여 년 전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우리 땅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과학적이며 실용적이어서 역사상 최고의 지도로 손꼽힌다. 하지만 크기가 매우 크고, 귀중한 자료라 일반인들이 박물관 등에서도 자세히 살펴보기는 어려웠다. 남북이 분단된 오늘날, 하나된 우리 국토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 주는 소중한 <대동여지도>를 누구나 소장할 수 있도록,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동여지도 축쇄본》을 문고본 크기로 만들었다. 옛 지도 느낌을 그대로 살려 편집하고 제본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우리 땅이 새겨진 찬란한 문화유산, <대동여지도>
19세기 조선은 내부적으로 세도 정치와 민란으로 정치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서양의 배들이 조선의 해안가에 출몰해 통상을 요구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전쟁에 활용 가능한 군사 지도가 절실해졌다. 또한 상업과 유통의 발달로 사람과 물자 이동이 잦아지면서 전국의 지리가 자세히 표시되고 이용과 휴대가 편리한 지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모두 반영하면서도 정확하고 상세한 전국지도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림과 조각 등에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열정이 깊었던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년 <청구도>를 제작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김정호는 최한기, 최성환, 신헌 등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지리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 1857년(철종 8년에는 여러 자료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전국지도인 <동여도>를 만들었고, 마침내 1861년(철종 12년 <동여도>를 기반으로 한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이 땅의 산줄기와 물줄기, 고을과 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