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코로나 시대, 시의적절한 반면교사
서문:
재앙의 바람
1장 희생자와 생존자
2장 ‘녹다운’ 열병
3장 이름 없는 살인자
4장 보이지 않는 적
5장 어느 치명적인 여름
6장 적을 알라
7장 죽음의 송곳니
8장 마치 유령과 싸우는 것처럼
9장 폭풍의 눈
10장 수의와 나무 상자
11장 스페인 여인 워싱턴으로 가다
12장 ‘독감을 어쩔 수가 없다’
13장 ‘토박이 딸이 죽다’
14장 치명적 항해
15장 죽음의 배
16장 ‘밤에 도적 같이’
17장 죽음의 가을
18장 휴전 기념일
19장 검은 11월
20장 여파
21장 ‘바이러스 고고학’
22장 홍콩 커넥션
23장 무덤의 비밀들
주석
참고 문헌
감사의 글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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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7년, 겨울이 끝을 보일 무렵에 프랑스 에타플의 제24통합병원에서 스무 살이었던 한 병사가 호흡기 질환으로 숨을 거둔다. 전쟁 통에 병사가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 무렵 기관지폐렴으로 죽은 병사들도 여럿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흔히 일어나는 일 중의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그 병사와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한 군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치료법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군 의료진들은 나름 해부학적 연구까지 수행하면서 병의 근원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막연한 결론만 내렸을 뿐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1918년 전 세계에서 1억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그렇게 전쟁의 포화로 엉망진창이 된 유럽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중립국이었던 탓에 대유행병 진원지라는 오명을 쓰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희생된 사람은 어림잡아 3천800만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감염자 가운데 10~20퍼센트를 죽인 스페인 독감은 발생한 지 첫 25주 안에만 2천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역사가들로부터 ‘흑사병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역사상 가장 큰 의학적 대학살’이라고 불린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 치명적인 대유행병에 ‘스페인 독감’이란 별칭을 붙인 것이 정확히 누구, 또는 어떤 매체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는 국왕 알폰소 8세를 비롯하여 대신들까지 감염되자 신문들이 적극적으로 이 질병과 관련한 소식을 다뤘다. 전시 언론 검열 탓에 공포나 절망감을 조장하는 소식을 실을 수 없었던 연합국 매체들은 스페인발 기사를 옮기기 시작했고, 어느 틈엔가 이 병을 스페인 독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스페인 사람들로서는 매우 억울할 일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처음부터 ‘스페인 여인’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스쳐 지나갈 유행병으로 인식하던 때라 신문의 삽화가들이 플라멩코 드레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