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제1부 강진 용혈암지의 관련 기록 검토
제2부 다산의 용혈 관련 기록
1. 「용혈행」
2. 「조석루기」
3. 「천책의 시권에 제함」
4. 「승려 초의 의순을 위해 써준 증언」
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표피장막책가도」
6. 「유용혈기」
7. 「만덕사고려팔국사각상량문」
제3부 고려 8국사와 용혈 관련 기록
1. 만덕산 백련사 원묘국사 비명 병서
2. 「만덕산 백련사주 요세 증시 원묘국사 교서」와 「관고」
3. 「만덕산 백련사 정명국사 시집 서」
4. 천인이 용혈의 서誓 스님에게 보낸 시 외 3수
5. 천인이 원환 스님께 보낸 시 2수
6. 진정국사 『호산록』 발문 외
7. 고려 관인의 『연사제명시첩』에 수록된 한시
8. 천책의 『연사제명시첩』 화답시편
9. 5대 이안과 6대 원혜 관련 글
10. 7대 무외 정오와 「암거일월기」
11. 두 편의 백련사 사적비
제4부 용혈암지의 공간 구성과 배치
1. 용혈 명칭의 유래
2. 강진 용혈과 용추
3. 문헌 기록을 통해 본 용혈암지의 공간 배치
4. 용혈암지 현장 공간
제5부 유물로 본 용혈암의 불교사적 위상
1. 고려 국왕의 하사품 향로와 「향로기」
2. 국왕의 하사품 금발
3. 용혈암지 5층석탑
4. 용혈암지 수습 청자 불상 파편
제6부 제언과 전망
다산, 유배지에서 고려 불교의 자취에 이끌리다
오랫동안 다산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해온 정민 교수는 근년에 강진을 중심으로 다산과 교유관계를 맺었던 이들의 자료들을 새롭게 발굴함으로써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를 펴내 조선 후기 실학사의 감춰진 면모들을 밝혀냈다. 『다산과 강진 용혈』은 그 연장선상에서 강진의 ‘용혈’이라는 장소가 다산을 불교의 세계로 끌어들였고, 천주교 신자임에도 다산이 고려 불교의 빛나는 성취들을 좇은 자료들을 새롭게 발굴함으로써 800년간 묻힌 역사의 단면을 환히 밝힌다.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1805년 다산은 만덕사 승려 아암 혜장을 처음 만났는데, 둘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아암은 온 힘을 다해 다산의 정착을 도왔고, 밤 깊도록 둘은 『주역』 등을 토론하며 학문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암이 다산에게 『호산록湖山錄』이라는 낡은 책을 한 권 내밀었다. “고려 때 이곳 만덕사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주맹으로 계시던 진정국사 천책 스님의 시문집이올시다.” 시를 읽은 다산의 눈은 놀란 빛이 되었다. “이런 시인을 몰랐다니! 이럴 수 있는가.” 다산은 시의 필자를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이규보에 견주면서 천책이 누구냐고 다그쳤다. 아암은 그 스님이 만년에 머물던 용혈암 터가 근처에 있으니 한번 같이 가자고 청했다. 이로써 1806~1807년경 다산은 천책에게로 끌려 들어갔고, 후에 고려시대 백련결사의 자취를 좇아 『만덕사지』를 편찬하게 된다.
용혈암은 고려 때의 암자 터이며 당시 스님을 뵙고자 조정의 고관들이 수레를 잇대어 기다리던 불교의 성지였다. 용혈암은 강진군 만덕산의 만덕사를 창건한 원묘국사 요세 때 처음 암자로 조성돼 백련결사에 속한 승려들의 수행처가 되었다. 그들은 여기 들어와 바깥세상을 차단한 채 한 글자 쓰고 세 번씩 절을 올리며 『법화경』을 사경하는 등 수행을 했다. 특히 천인, 천책, 정오 3국사가 거쳐가면서 이곳은 성지로 우뚝 섰다. 용혈 구역은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