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핀 적엔 보지 못했네
아마도 겨울 아침 거리를 걷다가 문득 어느 나무 앞에 멈춰 섰을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꽃 핀 적엔 보지 못했네 / 꽃 잔치 받치던 잔가지들 // 잎 난 적엔 보지 못했네 / 뻗으려 애쓰던 가지의 끝들 // 굳건하던 줄기와 억센 뿌리들 // 단풍 들고 낙엽 지고 서리 내리고 / 꽃도 잎도 열매도 떠난 / 겨울, 지금에야 나는 보았네
화려하고 싱그러운 것들에 취해 보지 못하던 가지와 줄기와 뿌리가 그것들 지고 난 지금에야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을 내고 받치느라 겪어야 했던 고통의 흔적들...
푸르던 그늘 아래 벌레 먹은 자리들 / 가지를 잃은 상처들 / 상처마다 무심한 딱정이들 // 얼마나 줄기를 올려야 하나 / 어디쯤 가지를 나눠야 할까 / 머뭇거리던 시간들 // 견디다 견디다 살갗에 새긴 깊은 주름들
비로소 꽃도 잎도 열매도 아닌
그제야 화자는 깨닫습니다. 바로 그것, 꽃과 잎과 열매 뒤에서 벌레 먹고 상처 나고 딱정이 앉은 몸뚱이, 아무렇지 않은 듯하였으나 말없이 번민하던 흔적을 살갗에 깊이 새긴, 주름진 그 몸뚱이가 바로 나무라는 것을. 그러고 나니 이제 볼 수 있습니다.
비로소 꽃도 잎도 열매도 아닌 / 저 나무가 햇살에 빛나는 것을 // 조용히 웃고 서 있는 것을
화자가 깨닫자 보게 된 것, 비로소 다른 무엇 아닌 제 자신으로서 빛나던 것이 단지 겨울나무뿐이었을까요? 그 아침, 나무가 서 있는 거리에서 그가 정말로 만난 것은 나무에 비친 어떤 사람 -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내거나 받치거나 키우거나 지키느라 그것들에 가리어져 있다가, 비로소 제 모습을 되찾은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어찌 자식들 다 키워내고 홀가분해진 나이 든 이들이기만 할까요. 자기를 가장 자기답게 하는 기본 - 줄기와 가지, 그리고 뿌리에 충실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일 테지요. 그러니 ‘겨울, 나무’는 바로, 당신의 어떤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