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律으로 성공(成하라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한 정율성은 의열단원으로 훈련을 받으면서 도청 정보 수집 등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비교해 남다른 차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음악적 역량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몸에 지니고 다녔고 피아노와 성악을 열심히 공부했다. 정율성의 음악적 조예를 높이 산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은 그에게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의미로 율성(律成이란 이름을 지어 줬으며, 그는 아름답고 힘찬 음률을 이뤄 인민에게 봉사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김원봉은 그에게 상하이에 있는 러시아인 크리노바 교수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 주었다. 타고난 음악성을 인정받은 정율성은 크리노바 교수로부터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유학 갈 것을 제의받지만, 겨레를 위한 독립운동의 신념과 의지가 컸던 바, 그는 결국 이탈리아행을 거절하고 만다.
주옥 같은 작품의 탄생
중일전쟁 발발 후 정율성은 김원봉의 의열단을 뒤로하고 1936년 10월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는 옌안으로 간다. 당시 옌안은 중국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항일 혁명의 성지로서, 중국 인민에게 있어 희망의 도시였다. 옌안에서의 생활은 몹시 궁핍하고 어려웠지만, 이곳은 그의 음악적 자질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곳으로, 옌안의 들끓는 혁명적 분위기는 정율성의 마음에 창작의 불씨를 타오르게 만들었다. 섬북공학을 거쳐 루쉰예술학원에서 수학하던 그는 당대 최고의 유행가인 <옌안송>을 만들어 이름을 알린다.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전투적 기개가 물씬 풍기는 이 곡은 중국인들은 물론 심지어 일본인들조차도 따라 부를 정도로 그 인기가 실로 엄청났다. 국공합작 이후 옌안과 태항산에 있는 팔로군 본부를 오가며 항일 운동을 하던 그는 인생 최대의 역작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게 된다. 총 8개 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 중 특히 날개 돋친 맹호가 전진하듯 힘차고 장엄하게 시작되는 <팔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