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말씀 007
서론 015
1. 인문주의, 동방으로 가다 045
2. 터키의 인문주의 079
3. 현대 터키 안의 흉내내기-독일계 유대인과 터키계 유대인의 자리 119
4. 보스포루스의 독일-나치의 음모와 망명객 정치 149
5. 이스탄불에서 『미메시스』를 쓴다는 것 188
후기 터키의 인문주의 유산 234
부록 에리히 아우어바흐가 터키에서 한 강연
19세기 유럽의 사실주의 255
문학과 전쟁 274
주 291
참고문헌 351
주요 용어와 고유명사 373
찾아보기 403
망명과 분리라는 표상
많은 학자들이 아우어바흐의 이스탄불 생활을 특별하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망명이 일종의 고립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며 그러한 상황이 지적으로, 또한 예술적으로 생산적이라는 시각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비평가들에게 망명은 여전히 지식인이 자신의 근거지에서 내몰려 다른 곳에 주거를 정할 수밖에 없게 될 때 생겨나는 비상한 혜안과 비판적 분리 상태를 나타낸다. 이로써 망명이라는 상태는 너무나도 쉽게 거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획득한다.
카데르 코눅은 이 같은 보편적 관념을 비판적으로 살핀다. 그 과정에서 1930~1940년대 이스탄불의 면면이 생생히 드러난다. 또한 현대에서 창의적인 활동과 관련해 굳어진 ‘망명’의 개념, 즉 다락방, 섬, 등대 같은 배타적이고 폐쇄된 공간과 같은 은유가 터키로 간 아우어바흐의 저술 활동을 나타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망명한 아우어바흐에게 보내는 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이스탄불에서의 삶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오래전부터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터키 국적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교수라는 직위도 포기하고, 그러나 그 전해 베른에서 출간한 『미메시스』를 자신의 논문 목록에 포함시킨 채 1947년 아내 마리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가 터키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아우어바흐는 오스만 제국의 풍부한 인문적 유산을 통해 『미메시스』를 완성할 수 있었다. 코눅에 따르면, 아우어바흐는 나중에 교황 요한 23세가 된 안젤로 주제페 론칼리를 통해 도미니크회 수도원 교회의 장서를 맘껏 열람할 수 있었다. 이 교회의 도서관에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라틴 교부론』도 있었다. 이 책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아우어바흐는 단테가 쓴 『신곡』 속의 역사 개념이 피구라(figura 방식의 해석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알고 나면, “자료를 풍부하게 갖춘 학술도서관”이 없었던 덕에 『미메시스』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아우어바흐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