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緖論
1. 1 明末 對明海路使行의 歷史背景
1. 2 明末 對明海路使行의 槪況
1. 3 明末 對明海路使行의 詳細內容
<表 - 1> 明末 對明 海路使行 使行團 目錄
1. 4 明末 對明 海路使行 關聯 文獻
<表 - 2> 明末 對明 海路使行 關聯 文獻目錄
1. 5 硏究 對象 文獻
<表 - 3> 明末 對明 海路使行 中 登州使行 關聯 文獻 目錄
1. 6 硏究의 內容과 方法
<表 - 4> 明末 對明 海路使行 登州府 經由地名 總覽表
2. 黃城島에서 廟島까지
2. 1 黃城島(皇城島
2. 1. 1 黑水海(千里海
2. 1. 2 黃城島(皇城島
2. 1. 3 黃城島 海潮寺
2. 2 ?(舵磯島/舵??島
2. 3 珍珠門(眞珠門
2. 4. 廟島(沙門島
2. 4. 1 廟島
2. 4. 2 天妃娘娘廟(天妃廟/神女廟
2. 4. 3 登州山
3. 登州府, 登州水城, 登州城
3. 1 登州府
3. 2 登州水城(登州外城/水城
3. 2. 1 登州水城
3. 2. 2 蓬萊閣
3. 3 登州城(登州?城/ 東牟城
3. 3. 1 登州城
3. 3. 2 軍門衙門/兵巡道衙門/兵備道衙門/海防道衙門/知府衙門/監軍道衙門
3. 3. 3 演武場(?場/訓煉院
3. 3. 4 開元寺
3. 3. 5 普靜寺(普淨寺/關北村
3. 3. 6 萬壽宮
3. 3. 7 (登州府文廟
4. 登州城부터 黃縣東界까지
4. 1 杏花村
4. 2 ‘疊石浦’?門
4. 3 “蓬縣仙觀”/“蓬瀛?區” ?門
4. 4 山店
5. 黃縣 동쪽경계에서 黃縣城까지
5. 1 “萊山聳翠” ?門/ “萊嶽具瞻”
5. 2 “淳于故里”(淳于??故里/淳于古里/淳于村
5. 3 ?水, 太史遺風
5. 4 黃縣城(黃縣/縣北館/黃縣東館馹
6. ?縣城부터 ?山館驛까지
6. 1 “古士?城”牌榜,古士?城, 盧仙勝跡(盧仙勝述/盧仙古里/盧仙遺?/盧仙故里, 稚乃河
6. 2 北馬鋪(北馬重鎭/北馬鎭/北馬鎭鋪/北馬店/白馬鋪
6. 3 “麻姑仙里”坊表(麻姑故里/麻姑仙跡, 廣河, 徐?城
6. 4 ?山驛
머리말
명청교체기 해상사행로를 통해 명을 오갔던 조선사신의 중국 사행 기록인 해로조천록(연행록에는 명청교체기 조선과 명, 청 사이에 이루어졌던 치열한 외교 활동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인들의 명과 청에 대한 인식, 명과 청 및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쟁의 양상,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무역과 경제 관계, 문화와 인적 교류 상황 등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국 사행은 조선 문인들에게 나라 밖을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으며, 사행 활동은 중국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제공했다. 그런 점에서 사행활동이 이루어진 사행로와 사행 경유지는 단순히 지도 상에 점과 선으로 표시된 물리적 교통로나 감정없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몸으로 부딪히고 발로 뛰었던 발자취 곧 그 시대사적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문화적 유산으로서 재인식되고 재이해될 필요가 있다.
조선사신들이 명나라로 사행을 가면서 주로 이용한 노선은 요동지역을 거치는 육로 노선이었다. 요동지역을 거치지 않고 해로 노선을 이용한 사행은 明初(洪武, 建文 연간1369―?, 崇禎 연간 1621― 차례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이루어졌다. 明初 사행의 목적지는 남경이었고, 明末 사행의 목적지는 북경이었다. 해로 사행로는 원래부터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여러 왕조와 교류했던 중요한 사행길이었다. 산동 등주(登州에는 대대로 한반도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신라관, 발해관, 고려관이 운영되었다. 조선의 경우 1621년 3월에 후금이 심양과 요양을 탈취하고 요동 반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사신들이 육로로는 안전하게 왕래할 수 없게 되었기에 선박을 이용해 바닷길로 산동 등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1637년 1월 후금(청과 정축맹약(丁丑盟約을 맺은 조선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후금(청의 수도인 심양에만 사신을 보내게 되었고, 1644년 3월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