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전기(『다케우치 요시미―어느 방법의 전기竹?好―ある方法の傳記』’가 담은 동아시아 사상 잇기의 삼중三重 구조
하나.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라는 사상가의 전모를 루쉰 연구자로 국한할 수 없지만, 그는 『루쉰잡기魯迅雜記』(2020년 초 한국어로 출간될 예정를 비롯 그의 루쉰 연구는 특별하다. 많은 일본인들이 그를 통해 루쉰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루쉰 연구가 다른 것들과 차별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그에게 있어서 루쉰이라는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다케우치 요시미의 중국 문학 연구가 처음부터 루쉰을 향했던 것은 아니다(따지고 보면 그가 중국 문학을 택해 대학에 진학한 것도 실은 대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의 니힐리즘적 태도에서 비롯된 우연이었다. 난폭한 중국인이 철로를 폭파해 일본 열차를 가로막았다는 거꾸로 된 이유로 일본이 군사 행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1931년의 만주사변. 도쿄 대학 문학부의 지나 철학·지나 문학과 1학년 학생이었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렇게 시작된 격변의 시대에 아시아(중국이라는 ‘타자’ 속으로 들어선다.
명작보다는 무명작가의 글을 찾아 읽던 어린 시절부터, 니체와 슈트리너를 읽으며 러시아 문학에서도 톨스토이의 도학자 면모를 경원시하고 투르게네프를 좋아하던 청년 니힐리스트는 이미 그 시절부터 문학을 하나의 ‘태도’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 일본과 중국 사이의 전쟁에 처음부터 관심을 가졌고, 최소한 약한 자를 괴롭히는 건 싫다는 감각을 줄곧 간직했다. 그러한 감각이 중국인 유학생을 비하하는 ‘지나’라는 말을 거슬러 ‘중국문학연구회’를 만들게 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자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나름의 중국의 상像을 만들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상 속에 안주하는 일본 낭만파와 연을 끊었다. 하지만, 그는 1942년 1월 중국문학연구회가 내는 잡지에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지지하는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라는 선언을 실음으로써 국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