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괴물이냐 군자냐?”
청렴, 강직, 당시 선비들의 표상 삼산공
군자의 풍도를 간직하니 사류가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영조가 “나는 처음에 당신이 조선의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노론, 소론 대신들에게 말해서 이태중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대를 귀하게 쓰려고 하는데, 왜 취임하지 않느냐’하자 이태중은 ‘나는 벼슬에 뜻이 없다’고 말했다.”
삼산공은 뇌물 수수 사건을 조사해 단호하게 뇌물 액수를 회수하고, 부패 비리 풍토를 개선했으며, 나라와 백성의 재물을 탐한 관리는 팽형 처벌하고, 외척의 힘으로 득세하면 파면시켰다. 엄격한 공직 사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관청의 곡식을 축나게 한 관리에게 장살형으로 처벌하려 했지만, 백성들이 호소하면 백성을 위한 죄이기에 면죄하되 축낸 것만큼 책임을 지고 채우라는 융통성도 있었다. 기준은 하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과중한 군역세를 감면해 군포를 개선하고, 빚을 탕감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으며, 철광업, 은광 산업, 양잠업 등 경제 개선 활동을 강화시켜 삶의 질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구휼 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평양감영, 해주감영의 창고를 고쳐서 식당을 만들고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에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 그들을 직접 짚신, 가마니, 새끼줄, 베틀 등의 작업에 종사하게 해서 생활이 나아지도록 도왔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덕치’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자식과 가정에 대한 가르침은 더 엄격했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서 먹으면 몸에 복될 것 없다면서 멸치 한 접시, 된장찌개로 달게 맛있게 먹으면 된다 했다. 전답이 많아지면 자식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기에, 차라리 나라의 가난한 이들에게 흩어줌이 낫다고 했다. 나와 내 식구들이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요즘 세태를 삼산공은 엄중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흑산도, 갑산, 진도 등 여섯 차례 유배
20년간 50여 회 출사 거부…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