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_천도
몽골의 1차 침략
의주의 항복과 철주의 항쟁│귀주성의 끈질긴 항쟁│박서와 김경손│자주성의 최춘명│충신과 반역자│관군의 패배│개경 압박│대몽항쟁에 나선 초적과 노비들
천도, 대몽항쟁인가 정권 안보인가
몽골과의 화친 성립│천도론의 대두│최이는 왜 천도를 생각했을까│천도 반대론│강화도로 천도하다│다루가치를 제거하라│천도에 대한 반발│민란의 촉발
천도 직후의 대몽관계
천도를 변명한 외교│계속되는 굴욕 외교│몽골의 2차 침략│살리타이의 전사│외교적 파탄│홍복원의 반란
새로운 왕도
궁궐과 관아│성곽│최이의 사저 경영│강도 찬양가
2_수성
몽골의 3차 침략
3차 침략의 개요│전면전을 기피하는 최이│민심 이반과 회유정책│자주성 함락│죽주성 전투│팔만대장경의 조판│항쟁을 위한 국론통합, 혹은 기만│황룡사와 9층 목탑의 소실
백제부흥운동
백제 부흥의 깃발│민란의 확산│어향, 나주에서의 패배│이연년은 누구일까
운주사, 설화 속의 백제부흥운동
운주사의 비밀│운주사에 모여든 사람들│운주사에 얽힌 설화│백제부흥운동과 천불 천탑│일어서지 못한 와불│몇 가지 남은 문제
대몽항쟁의 전술과 전략
산성입보?해도입보│대몽항쟁의 이중성│다시 화친하다│친조 회피│친조 대신 인질│국왕 고종과 최이
긴 전란, 짧은 평화
진양공 최이│관료집단에 대한 회유│위장된 평화│태평성대의 강도│몽골의 4차 침략│연안 도서의 개발│울릉도
3_위기
후계자 문제
후계자, 사위 김약선│출가한 두 아들│김약선의 급부상│김약선 제거│권력투쟁의 조짐│만전의 환속, 최항│후계자 최항
최항 정권
최이의 죽음│최항의 권력 계승│정권 장악, 무차별한 숙청│최항 제거 모의 사건│김경손의 죽음│최이의 처남 정안│시혜정책│권력강화, 중성 축조│외교협상 재개│몽골의 압박│전쟁에 대한 대비│배반의 사신
몽골의 5차 침략
침략 후의 최후통첩│몽골의 여섯 가지 요구│긴박한 사신 왕래│방호별감의 패전과 항복│도륙당한 춘주
《고려 무인 이야기 3―최씨 왕조 하下》,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천도
천도는 새로운 왕조의 창업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왕조의 창업이 아닌 상태에서의 천도는 매우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다. 최이 정권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한 천도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천도가 최초로 논의된 지 불과 5개월 만의 전격적인 조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몽골의 1차 침략 이후 화친이 성립되어 잠시나마 평화를 되찾은 가운데 최이는 천도를 결심하게 된다. 몽골 측에서 최이를 최고통치자로서 인식하고 교섭의 파트너로 여기는 데 큰 부담을 느낀 때문이었다. 몽골과 새로운 종속관계가 성립될 경우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을 염려한 최이로서는 몽골과 새로운 국제관계를 회피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전쟁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천도는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이었다. 천도 이후 몽골과의 굴욕적인 외교가 계속되는 것만 보아도 그가 항쟁이라는 대의명분만을 위해서 천도를 단행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강화천도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 아래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최씨 정권이 장기집권하는 데도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강화 천도 후 최이 정권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수성
강도로 천도한 후에도 몽골의 침략은 계속되었지만 웬일인지 몽골 군대는 강도를 직접 정벌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강도의 생활은 전란에 휩싸인 내륙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전란 속에서도 평화를 구가했다. 옛 수도 개경에서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최씨 왕조의 왕도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 시기에도 몽골의 침략은 계속 이어졌다. 3차 침략에서는 황룡사의 9층 목탑이 소실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최이는 전면전을 피하면서 해도입보와 산성입보라는 수세적인 대책만을 세울 뿐, 몽골과의 항쟁에 특별한 대응책을 내놓지는 않는다. 백성들은 이러한 극단적 보신주의에 실망했고,